독립운동가 정신, 봉사로 이은 아들

입력 2016. 8. 15.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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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째 이웃돕기' 김성식씨

[서울신문]김구 선생과 항일운동한 부친
“사회에 도움되어라” 당부에
매달 독거노인들 식사 제공
“늦게나마 아버지 유공자 신청”

김성식씨가 부친 김정로 선생의 유품인 80년 넘은 태극기와 김구 선생의 친필 ‘철혈남아’ 복사본을 선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했던 부친 유지를 받들어 팔순 넘은 아들은 10년 가까이 어려운 이웃에게 식사 대접을 해 왔다.

서울 중구 방산시장에서 40년째 음식점을 운영 중인 김성식(82)옹에게 올해 광복절은 그 어느 해보다 각별하다. 생전 마지막 소원으로 나라에 몸 바친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신청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09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혼자 사는 어려운 노인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매일 아침 방산시장 횡단보도에서 교통지도 봉사도 10여년간 했다. ‘나를 자랑하려 하지 말고, 네가 나보다 더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부친의 생전 뜻을 따른 것이다.

그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백범 김구 선생과 항일운동을 한 김정로(1914∼1958)씨다. 전북 순창 출신인 김씨는 광주고보 재학 시절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해임시정부와 용정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5년 전북 전주에 독립운동의 지하본부이자 사찰인 건지사를 세우는 임무도 맡았다. ‘정로’라는 이름도 백범이 호적 이름 ‘정규’에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바꿔 지어줬다고 한다. 김씨는 밀고로 체포돼 옥중에서 해방을 맞은 뒤 2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지만 마흔넷의 나이로 요절했다.

김옹은 7살이 돼서야 감옥에서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집에 들어올 겨를이 없었다”며 “파란 죄수복을 입고 파란 천으로 눈까지 가렸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를 여읜 뒤 생계를 꾸리느라 힘겨운 와중에도 선친 유지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식사 대접을 할 때 한 번에 50인분 넘게 준비하는 게 고되지만 ‘잘 먹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면 세상에서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평소 ‘내 이름을 팔아 잘 되려고 하지 말라’라고 당부했기 때문에 그동안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내 나이가 많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늦기 전에 아버지의 애국 활동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김옹은 부친 유품과 관련 기록을 모아 이르면 내년 독립유공자 등록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중구 관계자는 전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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