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사람 풍경] 애니에 미쳐 비디오방에서 살았다..'아키라' '인랑'은 1000번 넘게 봤다
Q : 중고 신인의 위풍당당 개선가다.
A : “대학 2학년 때 7분짜리 첫 단편 애니를 만들었다. 벌써 19년차 감독이다(웃음). ‘부산행’에 대한 폭발적 호응은 기대밖이다. 우리 사회에 퍼진 불안의식이 그만큼 큰 것 같다.”
Q : 애니메이션으로 출발했는데.
A :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마니아 기질이 있었다. 서울 고속터미널 주변에서 일본 비디오를 불법 복사해 봤다. ‘이웃집 토토로’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작을 접했다. 성인용 애니의 전설 ‘우로츠키 동자’, SF 명작 ‘아키라’도 볼 정도였다. 비디오테이프로 세탁기 박스를 가득 채웠다.”
Q : 꽤 조숙했던 모양이다.
A : “애니를 좋아하는 아이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았다. 일본에서 레이저 디스크가 나온 지 일주일 정도 지나면 작품을 구할 수 있었다. 관련 잡지도 모았다. 중학생 때 애니 감독이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
Q : 계속 그렇게 지냈나. 학교 공부는.
A :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반에서 거의 꼴찌였다. 담임 선생님이 제가 만약 대학에 간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까지 했다. 고교 때도 애니를 끼고 살았다. 일본 독립애니까지 섭렵했다. 미대 진학을 희망했기에 성적은 중간까지 끌어올렸다.”
Q : 왜 서양화과에 들어갔나.
A : “사연이 있다. 디자인을 전공하려고 했는데 점수가 안 좋아 3지망 서양화과에 붙었다. 대학 때도 샛길로 흘렀다. 홍대 주변 아모르 비디오방에서 살았다. 에로비디오를 하루에 서너 편 본 것 같다. 또 시간이 나면 음악감상실 백스테이지에서 보냈다. 외국 헤비메탈 뮤직비디오에 빠져들었다. 록밴드 라디오헤드·너바나를 좋아했다.”
Q : 일반 영화는 멀리하고 지냈나.
A : “비디오방에서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어느 날 진열장 맨 아래칸에 있던 옛날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죽이려는 목적이 컸다. 고전 중 고전인 ‘시민 케인’을, SF 거장 스탠리 큐브릭을 만나게 됐다. 여균동·장선우 감독 등 한국 영화도 보기 시작했다. 영화전문지 ‘키노’를 읽으며 견문을 넓혔다.”
A : “많이 보는 게 장땡이 아닐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을 복기할 수 있는 작품이 여럿 있다. 영화 한 편은 보통 1400~1800컷으로 이뤄지는데 계속 보다 보면 절로 암기가 된다. ‘아키라’ ‘퍼퍽트 블루’ ‘인랑(人狼)’은 1000번 넘게 봤다. 봐도 봐도 재미있다. 작품의 디테일을 속속들이 기억한다.”
Q : 왜 갑자기 노숙자인가.
A : “영화는 2년 전 완성했다. 구상은 2006년부터 했다. 노숙자가 급증한 시기다.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누구든 거리로 밀려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증폭됐다. ‘부산행’의 석우(공유)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좀비가 득실대는 KTX 열차와 좀비가 없는 열차, 그 사이 출입문을 경계로 인물이 변화한다.”
Q :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있나.
A : “대학 졸업 후 1년 반 정도 애니 회사에 다녔다. 외국 하청을 받는 곳이었는데 이미 호황기가 지난 때였다. 동남아·중국 등으로 일감을 뺏겼다. ‘내 작품을 하자’며 회사를 그만뒀다.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Q : 창업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A : “세상 물정을 몰랐다. 콘텐츠진흥원에서 사무실·기자재를 지원받아 장편 애니를 만들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를 깨닫는 데 두 달이면 충분했다. 통장 잔액이 0원이 됐다.”
Q : 어떻게 다시 일어섰나.
A :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돼지의 왕’을 만화로 그려 잡지사에 보냈지만 다 퇴짜를 맞았다. 포털 다음의 신인 코너 ‘나도 만화가’에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6~7년이 흘렀다. 그러다 상상마당 독립영화 지원작으로 ‘돼지의 왕’을 6개월 만에 만들었고 부산영화제와 프랑스 칸영화제에 초청받게 됐다.”
A : “‘돼지의 왕’이 0에서 1을 이룬 것이라면 ‘부산행’은 1에서 1000을 이룬 셈이다. 0에서 1까지 가기가 더 힘들다. 그때의 흥분은 상상 초월이다. 거의 백수 상태였으니까. 덕분에 ‘사이비’ ‘부산행’까지 올 수 있었다.”
Q : 애니 두 편 관객이 5만이 안 됐는데.
A : “상업영화와 잣대가 다르다. 나쁜 기록이 아니다. 되레 ‘사이비’ 때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원형탈모증도 생겼다. 평단의 호평을 계속 받을 수 있을지 부담감이 컸다.”
Q : 우리 사는 곳을 지옥으로 바라본다.
A : “‘혐오의 시대’라고 했다. 사람들 밑바닥에 ‘내가 못살고 있다’ ‘상황이 안 좋다’는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다. 사회에 대한 불신이다. 우리 현대사와 밀접한 문제다. 군부독재는 사라졌지만 세상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상실감이다. 청년들이 지금 울고 있지 않나.”
Q : 본인은 인생 역전을 이루지 않았나.
A : “그렇잖아도 ‘부산행’이 잘되면서 제 얘기를 들려달라는 강연 요청이 종종 들어온다. 하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소수의 성공 사례로 불공평한 세상을 합리화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계속 고민 중이다.”
Q : 종교에 대해서도 꽤 비판적인데.
A : “고교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미션스쿨(숭실고)을 나왔다. 지금도 가급적 주일을 지키려고 한다. 다만 맹신은 경계한다. 맹신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고통스러운 존재의 나약함을 주목한다.”
Q : 흔히 사회파 감독으로 불린다.
A : “모르겠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다. 영화를 통해 자기가 사는 세상을 보는 것도 큰 재미다. 그런 장르성에 충실할 뿐이다. 제가 사회파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도 사회파 영화로 불러야 하나.”
Q : 애니와 상업영화, 둘을 비교한다면.
A : “연출기법은 동일하다. 산업 규모가 다르다. 애니 쪽은 전문 스태프가 모자란다. 누구 하나 빠지면 대체인력을 찾기가 쉽지 않다. 실사영화는 곳곳에 전문가가 있다. 이번에 좀비 안무가(박재인)도 처음 알았다. 그래서 ‘카이’가 더 잘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A : “애니산업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다. ‘서울역’ 관객이 제한적이라면 ‘카이’는 전 가족이 대상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 이후 가족용 애니 화제작이 없는 것 같다. 수준 있는 애니가 계속 나오는 환경 마련이 가장 중요하다. 한 40만 명쯤 들면 좋겠다.” [S BOX] 『송곳』 만화가 최규석이 절친…“힘들 때마다 자신감 심어줘”
둘은 상명대 동창이다. 연 감독은 서양화과를, 최 작가는 만화학과를 나왔다.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공부하는 학생이 드물던 시절, 그들은 알음알음으로 만나게 됐다. 캠퍼스(서양화과 서울, 만화학과 천안)는 달랐지만 서로 꿈과 진로를 터놓는 사이가 됐다. 사회를 ‘삐딱하게’ 보는 성향도 비슷했다. 연 감독의 작품에도 최 작가가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돼지의 왕’ ‘사이비’ ‘서울역’ 등의 캐릭터 디자인과 시나리오 구성 등에 도움을 줬다. ‘부산행’에서 소녀 수안(김수안)이 부르는 노래 ‘알로하 오에(Aloha Oe)’도 최 작가가 추천했다.
“예전엔 메신저로 하루 종일 얘기를 했어요.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사서 새벽까지 함께한 적도 있고요. 규석이는 대학 시절부터 스타 작가로 떠올랐죠. 제가 힘들어할 때마다 ‘너는 재능이 있다’ ‘계속해’라며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JTBC 드라마로 제작된 『송곳』으로 유명한 최 작가는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등에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들춰내 왔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호는 주제가 분명하고, 표현력도 뛰어나요. 계획을 촘촘히 세우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의지가 굳은 친구입니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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