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너는 내 운명" 名唱과 시각장애인 제자의 동행

이동휘 기자 2016. 8. 1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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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국악제 대상 원진주 명창, 제자 김지연의 판소리 여행] 복지관 음악아카데미서 만나 발음부터 표정연기까지, 고통의 시간.. "같이 울기도" 원진주 "제자 보며 슬럼프 극복".. 김지연, 국악경연 금상으로 보답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내 사랑아."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정효아트홀. 무대에 오른 김지연(여·21)씨가 눈을 감고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의 마지막 소절을 뽑아냈다. 성춘향과 이몽룡이 서로 '밀당(밀고 당기기)'하는 장면이었다. 무대 아래서 김씨를 지켜보던 스승 원진주(여·39)씨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좋다"고 추임새를 넣었다.

공연이 끝난 뒤 김씨가 무대에 서서 원씨를 기다렸다. 김씨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다. 스승의 손을 잡고 더듬더듬 걸음을 내딛는 김씨를 향해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두 사람은 2012년 서울 관악구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의 '전통 음악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나 5년째 사제(師弟)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스승 원씨는 지난 2013년 임방울 국악제에서 대상을 받은 판소리 명창이다. 원씨의 지도를 받은 제자는 현재 수원대 국악과 3학년으로, 관현맹인국악단 예비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씨는 중학교 3학년 때 점자책으로 '서편제'를 읽고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서편제의 눈먼 여주인공 '송화'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송화가 받은 마음의 상처와 응어리진 한(恨)을 저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 소리꾼이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관객에게 스토리를 전달하는 소리꾼에게 '표정 연기'는 필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사람의 표정을 본 적이 없는 김씨는 "가사에 나오는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고 지었는데, 선생님이 '왜 우울한 표정을 짓느냐'고 하셔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표정 연기를 위해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의 얼굴을 내줬다. 웃고 우는 다양한 표정을 짓는 스승의 얼굴을 제자가 손으로 더듬어가며 촉각으로 익힌 것이다. 원씨는 "웃으면 올라가는 광대뼈 쪽 근육과 입꼬리를 만지게 했고 하나의 표정을 스무 번 정도 지어주면 지연이가 따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원씨는 자신의 입속에 제자의 손가락도 넣게 했다. 정확한 발음을 위해 혀의 위치와 모양을 가르쳐준 것이다. 원씨는 "가르치는 저나 배우는 지연이나, 정말 고통의 시간이었다"며 "둘이 껴안고 펑펑 운 날이 얼만지 셀 수도 없다"고 했다.

김씨는 대학 입시를 앞둔 2013년, 판소리를 포기하려 했다. "노래만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리(내레이션)', '재담(유머)', 발림(부채짓) 등 할 것이 너무 많아 버거웠어요." 이때 원씨가 김씨를 붙잡아줬다. 힘들어하는 제자와 하루 4~5시간씩 소리를 하며 오히려 훈련을 더 많이 시켰다. 김씨도 "제자를 위해 목이 쉬어라 소리 내시는 선생님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제자를 만난 것은 원씨에게도 축복이었다고 한다. 김씨를 처음 만났을 때 원씨는 긴 슬럼프를 겪던 중이었다. 2008~2009년 임방울 국악제에서 준우수상만 두 차례 받고 더 이상 발전이 없다고 생각해 판소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원씨는 "지연이를 보면서 빨리 명창 반열에 오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소리에 대한 순수성을 잃은 제 모습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를 만난 다음 해 원씨는 4수(修) 끝에 임방울 국악제에서 우승했고, 김씨는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김씨에게 원씨는 판소리만 가르쳐주는 스승이 아니다. '설리번 선생님'에게 배운 '헬렌 켈러'처럼, 김씨는 원씨를 통해 하나하나 세상을 알아가고 있다. 김씨는 "전에는 '산'이라고 하면 나무가 있는 흙더미 정도로만 알았지만, 지금은 선생님이 내 손바닥에 산의 모양을 그려주신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 5일 대한민국 장애인예술경연대회에서 국악 부문 금상을 받은 뒤 스승에게 짧은 수상 소감을 전했다. "소리를 넘어 세상을 알려주는 나의 설리번 선생님, 사랑합니다. 이 상(賞) 선생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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