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정 구한 '구급차 출산'

이현주 2016. 7. 28.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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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 기도 확보ㆍ산소 공급까지

6개월차 신입대원 침착하게 대응

서울광진소방서 강효민(왼쪽) 구급대원과 천티프엉씨 부부가 구급차에서 태어난 아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 광진소방서 제공

“산모가 진통이 심해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26일 오전 4시 서울 광진소방서 119방재센터로 다급한 목소리의 신고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 남성은 둘째 아들 출산이 임박했다며 “빨리 와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출산 예정일을 일주일 앞둔 이른 새벽 갑작스레 아내의 진통이 시작되자 남성은 아내와 처형, 세살배기 아들만 남겨두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겨우 택시를 불러 세웠지만 “위험하니 119에 신고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성은 그제야 떨리는 손으로 119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구급대원들은 출동 지령이 떨어진 지 6분 만에 서울 광진구 구의동 자택에 도착했지만 쉽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베트남 출신 산모 천티프엉(28)씨는 진통이 극심한 탓인지 비명만 질러댔고, 산후 조리를 도우러 닷새 전 입국한 언니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택시를 부르러 나간 한국인 남편 김성태(45)씨도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현장에 출동했던 강효민(29) 구급대원은 27일 “언제 양수가 터졌는지, 진통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오로지 자궁이 열린 형태만 보고 대처해야 했다”며 긴박했던 당시를 돌이켰다.

남편 김씨는 구급차가 출발하기 직전 극적으로 차량에 올라 탔다. 천티프엉씨가 다니던 산부인과는 집에서 불과 1㎞ 거리. 그러나 이송이 시작되자마자 산모는 출산에 들어갔다. 천티프엉씨를 구급차에 눕힌 지 2분 만에 아기 머리와 오른쪽 어깨가 자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곧이어 몸통과 다리까지 빠져 나오는데 걸린 시간은 다시 2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의료시설이 부족한 도서ㆍ벽지에서나 일어날 법한 ‘구급차 출산’이었다. 강 대원은 즉시 구급차에 마련된 분만 키트로 신생아의 구강 내 이물질을 제거하고 기도를 확보한 뒤 산소를 공급했다.

구급차 안에서 세상을 본 아이는 천티프엉씨 품에 안겨 무사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구급차가 생명 탄생의 현장이 된 셈이다. 강 대원은 “임용 6개월 차인 신입대원이라 꽤 떨렸지만 병원 실습생 시절 수차례 분만을 도왔던 경험 덕분에 침착할 수 있었다”며 “다문화가정에 소중한 생명을 선물했다는 생각에 더욱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김씨 가족에게도 둘째 출산은 더 없이 뜻 깊은 일이다. 김씨는 “5년 전 한국으로 시집 온 아내가 한국 산모들보다 훨씬 힘들게 임신 생활을 견뎌야 했다”고 전했다. 친정 식구도 없는데다 한국인 산모들 사이에서 활발한 정보공유도 낯선 이방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아파트 보안관으로 근무하는 김씨가 오전 8시 일을 나가면 아내는 첫째까지 돌보며 온종일 홀로 외로움을 삭혀야 했다.

출산 당일에도 이른 새벽 시간대라 마땅히 도움을 청할 데가 없었으나 구급대원들이 재빠르게 대처해 아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김씨는 “첫째 아들의 장래희망이 소방관인데 구급차에서 동생이 태어나는 걸 직접 보게 됐다”고 웃으며 대원들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채수봉 광진소방서 구급팀장은 “출동 당시에는 산모를 구급차에 눕히자마자 아이가 나올 것 같은 급박한 상황이었다” 며 “평소 훈련한대로 별다른 위기 없이 순산을 돕게 돼 직원 모두가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진소방서 대원들은 이날 천티프엉씨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 김씨 가족에게 미역을 선물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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