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살부터 멸치 손질.. 엄한 어머니가 날 만들어"

최윤아 기자 입력 2016. 7. 26. 03:05 수정 2016. 7. 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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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동 한식 연구가' 심영순씨] 셋째 유치원 때 싸 준 도시락 소문.. 재벌가에서도 요리 배우러 찾아와 "사랑하는 사람 위한 밥상이 최고" 최근 인생 얘기 담은 에세이 출간

"소금에 절이고 된장에 박고 물엿에 재우고… 한식은 여러 과정을 거칠수록 깊은 맛이 나요. 인생도 똑같아요. 오랜 기다림과 숱한 시련을 겪어야 누구나 감탄하는 귀한 인생이 됩니다."

지난 21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 요리연구원에서 만난 심영순(76)씨가 말했다. 심씨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 재벌가 며느리에게 요리를 가르쳐 온 요리 선생님이자 40년 동안 한식을 연구한 요리 연구가이다.

최근 케이블TV의 여러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2030세대에도 얼굴을 알렸다. 지난 18일에는 에세이집 '심영순, 고귀한 인생 한 그릇'(인플루엔셜 펴냄)을 냈다.

고운 한복에 늘 단정하게 손질된 백발, 겉모습만 봐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왔을 것 같지만,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콩나물을 다듬고 멸치 내장을 발랐다. 어리광은커녕 어머니의 칭찬 한마디에 목말랐기 때문이었다. 홍역으로 아들 둘을 먼저 떠나 보낸 어머니는 딸인 심씨가 태어나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품으로 달려드는 심씨를 밀쳐내기 일쑤였고 다정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뭐든 완벽하게,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어린 마음에 잘했다는 칭찬이 듣고 싶어 이를 악물고 살림을 배웠다.

스무 살 때 당시 육군 중위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2평(6.6㎡) 남짓한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고, 이후 시동생 2명과 시누이 2명, 시부모를 모셨다. 그늘이 깊으면 양지가 빛나는 법이다.

심씨는 "친정어머니에게 워낙 호되게 살림을 배워서인지 시집살이가 힘들지 않았다"며 "요리 잘하는 며느리는 시어머니도 어려워한다"고 했다. 남편이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서 살림살이도 조금씩 나아졌다.

본격적으로 요리를 가르친 건 1970년대부터다. 셋째 딸이 다니던 유치원 학부모들이 심씨가 싸준 도시락을 맛보고는 '반찬 특강'을 요청했다. 30명으로 시작한 강의는 수강생이 계속 불어났다. 소문이 나자 재벌가에서도 심씨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요리 연구가의 반열에 오르려면 경조사 음식은 물론 각 지방의 향토 음식과 종가 음식을 섭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때부터 서울 신촌의 시장부터 전라도, 경주의 종갓집까지 '맛있다'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비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렇게 요리 연구가로 바쁘게 살면서도 딸 넷을 키우고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8년간 모셨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만은 늘 구첩반상을 차려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새벽 소리가 나지 않게 장롱 아래 담요를 깔고 혼자서 이리저리 장롱을 옮겨가며 먼지를 닦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집안일을 했어요. 식성이 전혀 다른 두 어머니에게 매일 세 끼를 차려 드렸고요. 그렇게 50년 넘게 살았더니 어제는 남편이 '당신을 정말 존경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한식을 소개하는 자리에선 늘 한복을 입는다. 거추장스러울 때도 있지만, 한복이 한식을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해서다. "사실 한식이 외국 사람을 시각적으로 단박에 사로잡는 음식은 아니에요. 그렇기에 요리사가 한복을 입으면 한식의 매력을 빠르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한식의 대가(大家)에게 '살면서 가장 맛있었던 한 끼'를 물었더니 "막내딸이 차려준 아침밥이 가장 꿀맛"이었다고 했다. "알리지도 않고 무작정 갔는데 제가 좋아하는 명란젓, 굴비, 미역국, 나물 반찬을 줄줄이 내오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을 다해 차린 밥상이 가장 맛있는 밥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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