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배 타고 얼음 깨는 남자.. 좌우명은 '바다에 埋骨'

권순완 기자 입력 2016. 7. 2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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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유일 쇄빙선 김광헌 선장 30년간 한 직장서 배만 타 남극해에서 조난 당한 썬스타호 구조하기도 생태 연구하며 항로 개척 남극 장보고 기지에 물품 보급하는 임무도

이 남자의 직업은 배 타고 얼음을 깨는 것이다. 국내 유일 쇄빙선 아라온호 김광헌(54) 선장 얘기다. 1년 365일 중 250일 이상을 남·북위 75도 이상 극지(極地) 해상에서 보낸다. 도시 사람들이 비둘기를 보듯 그는 펭귄을 본다. 배를 따라오는 북극곰에겐 무심히 소고기를 한 점 던져준다. 김 선장은 "이따금 고래가 넓적한 해빙(海氷) 사이 갈라진 틈으로 숨 쉬며 물기둥을 뿜을 때면 '아, 여기가 북극이었지' 깨닫게 된다"고 했다. 김 선장을 지난 13일 인천항 제1 부두에 정박해 있는 아라온호에서 만났다. 아라온호는 남극에서 지난 4월 귀항했다.

재작년 아라온호에 오른 그는 이듬해 12월 남극해에서 조난된 어선을 구해 언론에 알려졌다. 남극 로스해(海) 해양 연구를 마치고 북상하던 중이었다. 한국 원양어선 '썬스타호'가 아라온호로부터 241㎞ 남쪽 지점에서 구조를 요청해 왔다. 썬스타호는 메로(이빨고기) 조업을 하러 선원 39명을 태우고 가던 중 수십 조각의 유빙에 둘러싸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얼음을 부수며 8시간을 달렸죠. 사고 현장에 도착해 보니 썬스타호는 직경 약 30m 둥근 유빙 위에 얹혀져 있더군요. 배가 15도 정도 기울어 조류 때문에 갑자기 뒤집힐 수도 있었어요."

작업 공간이 필요해 우선 썬스타호 반경 200m의 얼음을 싹 깨부쉈다. 이후 예인용 줄을 썬스타호에 걸고 아라온호를 서서히 끌어당겼다. 구조작전 3시간여 만에 썬스타호는 스르륵 미끄러져 물 위에 떴다. 썬스타호 선원들은 "목숨을 구해줘 고맙다"며 답례로 복귀용 연료와 길이 1m가 넘는 메로 여러 마리를 줬다. 원양어선노조는 나중에 그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김 선장은 "구조가 끝나고 복귀할 때 선내 식당에서 얼음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며 먹었던 메로 요리가 일품이었다"고 말했다.

부산 태생인 김 선장은 1985년 한국해양대를 졸업하고 범양상선(현 STX마린서비스)에 취직한 뒤 30년 넘게 한 직장에서 배만 탔다. 과묵하다는 이유로 '곰'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아라온호 전엔 주로 4만t급 이상 대형 상선을 탔다. "재작년 회사가 아라온호 선장직을 제안했을 때 바로 타겠다고 했어요. 5대양 7대주 정복이 해대생 때부터 꿈이었는데, 남·북극해와 남극 대륙만 못 가봤었거든요. 쇄빙선 타고 1년 만에 달성했죠." 그의 좌우명은 '바다에 매골(埋骨·뼈를 묻다)'이다. 해대의 다섯 가지 교훈(校訓) 중 하나라고 했다.

1년 중 두 달가량 휴가 기간을 빼면 아라온호가 있는 곳이 바로 김 선장의 주소다. 아라온호는 매년 7월 말에서 9월 말까지 북극해를 항해하고, 10월 말부터 다음 해 4월까진 남극해를 누빈다. 각각 여름을 맞아 유빙의 두께가 얇아지는 때다. 바다 위에서 생태·해저지질 연구를 하고 항로를 개척한다. 남극 장보고 기지엔 물품과 연료를 보급해 준다. "장보고 기지에서 쓰는 기름은 영하 60도에서도 얼지 않게 특수 제조된 '남극유'예요. 이걸 대원들 가족이 한국에서 부치는 소포와 함께 전달해주는데, 열댓 명 대원들이 아주 반가워합니다. 대략 10개월 만에 보는 타지인이거든요."

21년 차 선장인 그이지만 극지의 바다는 새롭고 신기하다. "보통 사람은 1년에 한 마리 보기도 어려운 고래가 7~8마리 떼로 이동하는 장관은 잊기 힘들 겁니다. 해빙 위에서 일광욕 하는 바다표범은 무슨 배짱인지 배가 코앞까지 가도 안 움직여요. 멀뚱멀뚱 지켜만 보길래 '교통사고'를 낼 수 없어 비켜간 적도 많습니다."

보급 없이 한 달가량 이어지는 해상 연구가 끝날 때쯤 선상 파티를 연다. 남극 아문젠 해역의 한 유빙 위에서 빙상(氷上) 파티를 연 적도 있다고 한다. "얼음 위에서 숯불에 돼지 바비큐를 굽고 맥주를 나눠 마신 뒤 야구공으로 캐치볼을 합니다. 배 안에선 좀이 쑤시니까 다들 신나 하더라고요."

북극에 갈 땐 알래스카에서 북극곰 공격에 대비한 '호위 용병'을 미리 고용한다. 유빙 위에 내려 GPS(위치 추적) 기기를 설치·수거하는 연구원을 북극곰이 언제 덮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엽총으로 무장한 에스키모 원주민 3명을 데리고 탔는데, 다들 술꾼인데다 서로 사이도 안 좋더라고요. 의사소통도 그중 젊은 사람을 통해 영어로 통역해야 했고요. 북극곰보다 에스키모가 더 속을 썩였어요. 그 이후로 미국인 용병을 태우고 있습니다."

남극이 북극보다 더 추워 얼음이 더 두껍고 그만큼 깨기 힘들다고 한다. 남극 대륙에 붙은 정착빙(定着氷)은 유빙보다 단단해서 특히 뚫기 어렵다. 김 선장은 유빙 지역을 통과할 때 선교에서 거의 밤을 새운다. "어차피 극지대 여름은 백야(白夜)여서 대낮처럼 환합니다. 일하기 좋죠."

극지연구소는 2021년까지 두 번째 쇄빙선을 건조할 계획이다. 새 쇄빙선은 더 긴 항속거리와 더 뛰어난 쇄빙 능력을 갖출 예정이다. "정년까지 얼음 깨며 다니고 싶다"는 김 선장은 "제2 쇄빙선을 타면 저 멀리 북극점(北極點)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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