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檢'을 놓고 잡은 삽.. 밤나무에 인생 걸다

강훈 기자 2016. 7.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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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기자의 와일드 터치] '밤나무 검사' 송종의 前법제처장

대검찰청 중수부장과 서울지검장을 지낸 송종의(75)는 1998년 법제처장(장관급)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났다. 그의 선택은 '전관 변호사'도, 대형 로펌도 아닌 충남의 한 농촌이었다. 재작년엔 그동안 밤 농사지은 소출로 일 잘하는 후배들 표창하는 재단법인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장맛비가 퍼붓던 지난 4일, 충남 논산시 양촌면 양촌리를 찾았다. 백발 성성한 촌부(村夫)가 된 송종의는 "독특한 삶을 산 것이지 훌륭한 삶을 산 게 아니다"면서 "귀농은 운명이었고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 아니냐"고 했다. 그는 자신이 일군 농산물기업 써니빌㈜을 보여줬다. 밤 저장시설, 딸기 가공시설, 직원 기숙사 등이 1만㎡(약 3300평) 농장 내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인터뷰가 무르익자 "검사는 명예를 먹고 살지, 돈 버는 직업이 아니다. 곁불 쬐는 검사는 당장 그만둬야 한다"고도 했다. 홍안(紅顔)의 검사 시절 카랑카랑했던 목소리가 여전했다.

"국토를 초록으로 덮으리라" 맹세

육군 법무장교로 월남(베트남) 파병을 자원했던 송종의는 1967년 5월 귀국길 수송기에서 한반도를 내려다봤다. 월남과 중간 기착지인 필리핀에서 지겹도록 보아 온 초록 대지는 간데없고, 한반도 남단에서 경기 오산 비행장까지 누런 황무지가 이어졌다. 그 충격에 송종의는 장교수첩 한편에 이런 시조를 썼다. "초록만 보던 눈이 황토색 분별 못해/ 눈 비벼 다시 보아 민둥산을 알았네/ 이렇게 헐벗었더냐? 꿈에 그린 내 조국/ 옷을 입히리라 초록으로 덮으리라/ 더위와 추위 막을 나무를 심으리라/ 이 결심 헛되이 마라 천지신명 다 안다" 시조에 능한 검사로 알려진 송종의는 지금까지 167수의 시조와 한시를 남겼다.

―'초록으로 덮겠다'는 그 결심이 운명의 시작인가 봅니다.

"천지신명 다 안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이 헛말 하고 살면 안 돼."

―우리 산이 그렇게 헐벗었었습니까.

"땔감이 없으니 너도나도 산에 가서 나무를 베었던 거야. 팔아먹기도 하고 집에서 때기도 하고, 국토 전역이 민둥산으로 바뀐 거지. 오죽했으면 정부가 치산녹화를 국책 사업으로 추진했겠어. 그 길로 나도 나무 심을 곳을 찾아다녔지."

―어디 어디 다녔나요.

"초임지인 대구지검 근무할 땐 낙동강변 돌아다니며 대구와 구미 인근에 적당한 하천 부지를 찾아봤어. 그런데 경북도청에서 상류에 안동댐 지으면 오히려 심은 나무들이 물 흐름 막아 홍수를 키운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낙동강 주변은 포기했지. 1971년 대전지검 강경지청(현 논산지청)으로 옮겨선 금강을 따라 주변을 샅샅이 뒤졌어."

―검사가 산과 강을 돌아다니면 이상하게 보지 않던가요.

"일 없는 휴일에 다니니 선배들은 뭐라고 안 하지. 문제는 군청 공무원들이 술렁거리는 거야. 젊은 검사가 산림 비리 찾으러 직접 산과 강으로 뛰어다닌다고 본 거지. 월남 파병 얘기부터 쭉 해줬는데도 못 믿겠다는 표정이더라고."

―그렇게 헤매다 이곳(논산 양촌면)을 찾은 것이군요.

"4년을 찾아다닌 거지. 논산 양촌면 일대에 버려진 국유지 3곳을 발견한 거야."

―나무는 언제 심었습니까.

"그러니까 43년 전인 1973년 4월 5일이었어. 양촌면 석서리와 임화리 일대 20만평에 밤나무 1만주와 낙엽송, 개량 소나무를 심었지."

―국유지에 아무나 나무 심어도 되나요.

"산림 녹화를 위해 정부가 조림 대부(貸付) 제도를 운영했지. 나라 땅을 헐값에 빌려 나무를 심게 해 주고 그 나무에서 얻는 소득을 개인이 가져가는 제도야."

―묘목 값이 적지 않았을 텐데요.

"4~5년 모아둔 검사 월급과 대구지청 떠날 때 받은 전별금으로 샀지. 당시만 해도 검사가 임지를 떠나면 선배 검사와 그 지역 유지들이 돈 모아 줬잖아. 그 돈 안 쓰고 모았다가 나무 사는데 썼어."

―심으면 나무가 알아서 자랍니까. 관리를 해야 할 텐데.

"나무 심고 나서 서울로 발령 났어. 그 뒤부터 주말마다 뻔질나게 서울과 논산을 왔다 갔다 한 거야. 나무 키우는 게 은근히 손길 많이 가거든. 나무 상태 체크하고 비료 챙기고 그러는 거지."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을 텐데요.

"처음엔 고속버스 타고 내려와 자전거 타고 돌아다녔지. 나중엔 포니, 마크Ⅴ 고물차 사서 왕복했고. 그동안 폐차시킨 차가 3대야. 나무 관리 하러 40만㎞ 이상을 운전했어. 백만리를 쫓아다닌 거지."

―검찰 간부들 반응이 어땠나요.

"쉬는 날마다 나무 돌보러 간다니 처음엔 미친 놈이라고 했지. 하지만 내 의지를 알고 나선 시비 걸지 않더라고. 그때부터 '밤나무 검사' 소리 들은 거야."

상관들이 아낀 출세한 검사

송종의는 잘나가는 검사였다. '나무' 외에는 한눈 팔지 않고 일에 집중했던 그를 상관들이 무척 아꼈다고 한다. 서울지검 특수부장, 대검 중수부장, 서울지검장, 대검차장 등 한 자리만 해도 가문의 영광이라는 검사 요직을 차례로 거쳤다. 대구·경북 TK 출신이 주류였던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지연(地緣) 보잘것없는 이북 출신 검사가 그 자리에 발탁되는 것은, 탁월한 능력자이거나 뛰어난 처세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깐깐하고 꼼꼼한 검사라는 평도 있습니다.

"후배 여섯 명과 함께 근무할 때였지. 항소이유서를 작성하는 데 세 명이 뚝딱뚝딱 일을 너무 빨리 잘하는 거야. 가만히 봤지. 이 작자들이 복사본 잔뜩 쌓아두고 피의자 이름만 바꿔 쓰는 식이더라고. 사건마다 내용이 다 다르고 항소 배경이 같지 않은 데 그게 뭐하는 짓거리야. 복사본 몽땅 폐기하고 호통치며 그 후배들 특별 관리했지."

―재임 시절 굵직한 사건이 많았습니다. 서울지검장 시절 지휘한 슬롯머신 사건에선 고검장이 구속되고 다른 고검장 두 명이 옷을 벗었지요.

“정관계 인사와 검찰·경찰 많은 간부들이 연루된 대형 사건이었어. 검찰 역사엔 치욕적인 사건이고. 당시 강력부장 유창종 검사가 아니었다면 그런 사건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거야. 보기 드문 수재였던 유 검사가 강한 추진력과 감각으로 성과를 만들어냈어. 지금도 그의 노고를 잊을 수 없어.”

―당시 수사팀에 홍준표 지사와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 있었고, 이들이 작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사건에서 총장과 피의자로 만나지 않았습니까.

“비극적인 드라마야. 작년 사건 났을 때 둘 앞으로 편지 쓴 적이 있었지만, 보내진 않았어. 그들을 부하로 둔 내 심경이 어땠겠어.”

변호사 개업 대신 영농법인 세우다

송종의는 1995년 대검차장을 마지막으로 검찰을 떠났다. 이력만 보면 검찰총장 후보 1순위였지만, 아쉬워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만사분이정(萬事分已定) 부생공자망(浮生空自忙)”이란 글을 인용했다. ‘모든 일은 이미 분수가 정해져 있는데 부질없이 바쁘게 움직인다’는 뜻으로 사람은 자신의 그릇을 아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송종의는 이듬해 법제처장으로 1년 3개월간 봉직하고 이후 관직과 인연을 끊었다. 처장 퇴임사엔 이런 대목이 있다. “귀거래혜(歸去來兮) 영고무상(榮枯無常) 산수자한(山水自閑) 좌간부운(座看浮雲)”. ‘이제 돌아가네, 성함과 쇠함이 다 무상한 것, 산과 물이 한가로우니 조용히 앉아 뜬구름을 보리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다시 양촌리에 오신 겁니까.

“나를 반기는 나무가 있고 산이 있는 곳이잖아. 제자리 찾아온 거지.”

―변호사 개업했으면 돈 많이 벌었을 텐데요.

“지금까지 변호사 등록을 하지 않았어. 대신 다른 걸 개업했지.”

―그게 뭡니까.

“양촌영농조합법인(써니빌)을 설립했어. 자네가 서 있는 이곳 말이야. 애지중지 가꾼 그 밤나무들이 장성해서 한 해 50t의 소출이 나와. 600가마나 된다고. 그 많은 걸 혼자 어떻게 처리해. 이웃들하고 조합 만들어 함께 운영해야지.”

―아예 농업인 될 작정을 하셨군요.

“냉동창고, 가공시설 차례차례 지어나갔지. 공장 한편엔 내외가 살 2층짜리 양옥 짓고 천고재(天古齋)라는 이름도 붙였어.”

―천고재에도 의미가 있겠지요?

“외아들을 스무 살이던 1996년 교통사고로 잃었어. 그 슬픔 말해 뭐하겠나. 부산 한 사찰에 머물며 마음 가다듬었지. 그때 나는 천목(天目), 처는 고불법(古佛法)이란 법명을 얻었더랬어. 그 둘이 사는 집이 천고재인 거야.”

송종의는 2009년 ‘밤나무 검사가 딸에게 쓴 인생연가’라는 책을 냈다. 출가해서 미국에 살고 있는 외동딸 미현에게 보내는 22만3000자 분량의 편지와 자작 시조, 한시 등을 모은 것이다. “우리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처럼 다정하게 놀아주지 않는 거야”라며 엄마를 보채며 울었던 어린 딸의 상처를 뒤늦게나마 어루만져주려고 쓴 이 편지에는 “그때는 미현이 울었고, 지금은 백발 노인이 된 아빠가 울면서 이 글을 쓴다”는 내용이 나온다. 재경부 사무관을 거쳐 미국 대학 교수로 근무하는 사위와 미현은 여름철 한 달 국내에 머물다 돌아간다.

농사 지어 번 돈으로 문화재단 설립

―그런데 (책장에 있는) 저 300만불 수출탑은 뭡니까.

“밤 수출 많이 했다고 2010년 무역의 날에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거야. 그런데 다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무슨 말입니까.

“밤 수출이 쉬운 게 아니야. 사기꾼이 많다고.”

―검사 출신이 사기를 당하나 봅니다.

“검사들 밖에 나오면 봉이야 봉. 미국으로 주로 수출했는데 현지 바이어들이 처음엔 물건 받고 꼬박꼬박 대금 지불하더니, 마지막 두 컨테이너 정도는 제품 질을 따지며 대금을 보내지 않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물건 떼였다고.”

―소송하면 되지 않습니까.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 소송하면 비용 더 들고 언제 해결될지도 몰라. 그래서 수출 물량 줄이고 지금은 내수에 치중해. 밤뿐만 아니라 딸기·포도·모과로 사업 품종도 다변화하고 있지. 요즘 직원 15명에 매출 100억원 한다고.”

―귀농 기업인 인터뷰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더 어울리는 것 같네. 작년부터 영농조합을 주식회사로 바꿨어. 써니빌 주식회사. 이 회사에서 작년에 가공한 딸기가 3000t 가까이 돼. 오뚜기에 딸기잼 원료를 납품하고 있다고. 이만하면 송종의 성공한 거 아니야?”

그가 치부(致富)를 위해 농사 짓는 것은 아닌 듯했다. 재작년 송종의는 수익금 11억5000만원을 탈탈 털어 ‘천고법치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정의로운 사회와 법치주의 확립에 기여한 공직자에게 매년 천고법치문화상을 주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 엄정한 재단 운영을 위해 법조계 명망가들을 이사로 영입했다. 통합진보당의 위헌정당 결정을 이끌어 낸 법무부 TF팀, 방위사업 비리를 밝혀낸 검찰 합동수사단과 감사원 특별감사단, 경찰청 생활안전국 등 6곳이 지금까지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들에겐 순금 30돈짜리 금메달과 현금 1000만원 이상의 포상금이 주어졌다. 송종의는 회사 수익의 대부분이 재단으로 유입되도록 이미 조치를 취해 놓았다고 한다.

―재단 유지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

“내 인생 가장 큰 숙제 아니겠어? 비용이 1년에 1억원 가까이 들어가더라고. 며칠 전에도 올해 회사 수익금 8500만원을 재단에 배당했어. 검사나 수사기관이 상 받는 일이 별로 없잖아. 나라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표창해주고 싶은 거지.”

―하지만 요즘은 못난 검사도 많습니다.

“검사는 명예 먹고 사는 직업이야. 돈 벌려면 그 머리로 다른 일 했어야지. 권력에 따라오는 돈 따위의 곁불 쬐려는 검사는 그만두는 게 마땅한 거야. 검사는 국가와 국민에 대해 무한한 충성 의무를 가진 직업이라고. 그래서 국가가 평검사에게 고위 공무원 대우를 해주잖아.”

―전관예우 관행이 문제 되고 있는데.

“원래 취지는 좋은 제도야. 경험 많은 선배를 존중해줘서 그들이 하나라도 더 사회와 조직에 기여하고, 후배들을 가르치라는 취지 아니겠나. 그런데 여기에 사심 있는 일부 선배들이 돈벌이에 후배를 이용하고 있는 거지. 그래도 지금 우리 사회에선 검찰이 법치와 정의를 구현할 국가의 마지막 보루라고 본다. 내가 검사하던 시절엔 보안사령부, 안기부, 그다음에 검찰이었거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릴 적 가난

송종의는 1941년 평안남도 중화군 신흥면에서 태어났다. 면장을 지낸 부친이 정미소와 양조장을 운영하는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다. 하지만 해방 직후 북측에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일가가 남쪽으로 내려와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어릴 적 기억이 납니까.

“여섯 살 때 개성 송악산 부근 38선 넘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해. 북한 경비대원 두 명과 맞닥뜨렸지. 생소한 어투의 키 큰 경비원이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거야. 어머니가 모든 가족이 남쪽에 있다고 애원해도 막무가내더라고. 그런데 말씨 익은 키 작은 경비원이 어서 빨리 가라고 허락해준 거지. 그때 못 넘었으면 지금 송종의도 없었겠지.”

―남쪽 생활은 어땠습니까.

“피난왔을 때 아버지가 이미 환갑이 지났어. 거적때기 움막집 전전했지. 열 살 되니 전쟁까지 났잖아.”

―공부는 잘했나 봅니다.

“용산고 다닐 때야. 월사금 못낸 학생은 앞자리에 못 앉고 제일 뒷자리에 앉았어. 내 자리도 당연히 거기지. 하지만 담임은 월사금 내든 못 내든 항상 앞자리에 날 앉혔어. 대신 답안지 채점 같은 선생님 잡무가 내 몫이었어.”

―그렇게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군요.

“작은 형도 서울대 법대 갔는데, 고시에 번번이 떨어지는 거야. 내가 고시 합격해서 집안 세우려고 한 거지. 원래 라디오 조립 잘하는 공과대 체질인데 고시 붙으려고 법대 간 거야.”

―참 힘든 시기였습니다.

“초·중·고·대학교 졸업 앨범이 없어. 살 돈이 없었으니까. 몇 년 전 서울대 법대 동기들이 대학 졸업앨범 복사해서 선물로 줬어.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학사모 쓴 사진이더라고. 셔츠와 넥타이 모두 사진사에게 빌린 것이었지. 이제 그 얘긴 그만하자. 눈물밖에 안 나.”

송종의는 얼마 전부터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다. 삶을 예찬하는 내용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잘못한 20가지를 뉘우치는 내용이라고 한다. 긴 얘기가 끝나자 장맛비가 그쳤다. 송종의가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송종의의 차가 쇠고깃집으로 향하자 그를 평생 내조한 촌부(村婦)는 “덕분에 쇠고기 먹게 됐다”고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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