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판결문은 밥, 추리소설은 꿈.. '투 잡' 뛰는 부장판사

곽아람 기자 2016. 7.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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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째 추리소설 펴낸 '한국의 존 그리샴' 도진기 판사

판결문과 추리소설. 도진기(49)는 두 종류의 글을 쓰며 산다. 전자는 그에게 밥이요, 후자는 꿈이다. 그는 서울북부지방법원 부장판사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7년 판사로 임용됐다. 동시에 그는 추리소설 작가다. 2010년 단편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지금까지 여덟 권의 추리소설을 냈다. 2014년엔 백백교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장편 '유다의 별'로 한국추리문학대상을 받았다. 작품 중 네 권이 중국에 수출됐다. 영화사와 드라마 제작사에 판권이 팔린 것도 네 편이다. 팬들은 그를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고 부른다. 지난 21일 서울 북부지법 사무실에서 도진기를 만났다. 신작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가 최근 출간됐다.

43세에 추리소설 작가 데뷔

그간 쓴 소설이 꽂혀 있는 책장 옆 옷장 문으로 법복 자락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부업과 본업이 팽팽한 균형을 이룬 풍경이 '투잡족(族)'의 이상(理想)에 가까이 간 방 주인의 삶을 투영했다. 도진기는 양복 재킷 단추를 단정히 채운 채 기자를 맞이했다.

―판사 생활 14년 차인 43세에 갑자기 추리소설 작가로 데뷔했다. 계기가 있나.

"서른 살부터 마흔 무렵까지 책을 손에서 놓고 술, 음악, 그림 같은 감성적인 유흥 내지는 도락(道樂)에 몰두했다. 그간 읽었던 책이라든가 지식의 증가 같은 것이 전혀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09년 헌법재판소 파견 근무를 하게 되면서 지하철로 왕복 2시간씩 출퇴근을 하게 됐다. 지하철 타는 게 지루해 히가시노 게이고 등 일본 작가 추리소설을 읽었다. 엘러리 퀸 정도가 추리소설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일본 미스터리물이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도 한번 써 보자' 생각했다."

―마흔 넘어 소설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

"판사들이 아마 다 비슷할 거다. 마흔 넘어가서 생활이 판에 박힌 듯 돌아가면 법 이외의 취미 같은 걸 찾게 되는 시기가 온다. 노래나 그림에선 프로를 쫓아갈 엄두가 안 나는데 추리소설에 대해서는 심리적인 거리감이 적었다."

―원래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던 건가.

"한 번도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대학교 때도 문청(文靑)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만화, 게임, 추리소설, 무협지 등 앉아서 즐기는 걸 굉장히 많이 했다. 그게 축적되다 보니 나도 수용자에서 생산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마흔 넘어 다시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이 취미가 손 닿는 곳까지 왔구나'라는 느낌을 받은 거다."

―원래 추리소설을 좋아했나.

"중학교 때부터 추리소설광(狂)이었다. 학교 도서실에 있는 추리소설을 몽땅 다 읽어치울 정도였다. 코난 도일, 애거사 크리스티, 반 다인…. 수학을 좋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트릭을 사용해 고도의 두뇌 게임을 요구하는 본격 추리물에 흠뻑 빠졌다."

어둠의 변호사와 고시생 탐정의 탄생

도진기 작품 세계엔 두 명의 탐정이 있다. 하나는 마른 체격에 검은 낯빛, 작은 눈에 비뚤어진 입술을 가진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아르바이트로 탐정 노릇을 하는 고시생 진구다.

―'뒷골목 변호사' 고진은 당신의 분신인가.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데 작품을 써나가다 보니 캐릭터가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됐다. 사실은 책을 쓰기 전부터 그 캐릭터가 마음속에 있었다. 법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솔직히 말해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다. 법이라는 것에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법조계 뒷골목에서 리베로처럼 살면서 법에 엿 먹이는 인물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다가 소설을 쓰면서 캐릭터를 가져온 거다."

―진구 캐릭터는 어디서 나온 건가.

"고시원 생활을 하던 20대 때의 나다. 법대생이었지만 법 공부가 싫어 방황을 많이 했다. 대학 4년, 대학원 1년을 허송세월하다 군대에 가니 그중 내가 제일 못한 인간이더라. 그래서 내가 먹고살 수 있는 길이 이것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사법시험 공부를 했다."

―고진은 한때 판사였지만 조직 생활이 맞지 않아 법복을 벗는다. 판사란 지루한 면이 있는 직업인가.

"식물과 같은 직업이다. 보람도 물론 있다. 굉장히 심하게 다투던 사건의 조정을 성립시켰다든가 처지가 딱한 사람에게 좋은 판결을 해 줘서 그가 눈물을 흘리며 간다든가 할 때다. 구렁텅이에 빠진 개인에게 도움을 줬을 때 느끼는 보람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다."

―취미 수준을 넘어선 작가 활동을 하고 있다. 조직 눈치가 보이지 않나.

"책을 두세 권 낼 때까지는 겁 없이 썼다. 그런데 지금은 조심스럽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법원 내 묵은 정서가 피부에 와 닿는다. '일 등한시하고 글쓰기에만 집중하는 것 아니냐' 하는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골프에 나의 글쓰기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무래도 추리소설이라니 낯선 모양이다."

―집필은 주로 언제 하나.

"늘 주말이다. 아내와 딸이 모두 잠들어 있는 새벽 6시쯤 일어나 오후 될 때까지 쓴다."

"한국 추리소설사에 기록되고 싶다"

그의 최신작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대학 시절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경쟁했던 세 남자가 20년 후 여자가 남편 살해 혐의를 받게 된 것을 계기로 다시 깊숙이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데뷔 6년 만에 쓴 첫 법정 추리물. 그간 탐정물에 주력했던 도진기에겐 새로운 시도다.

―이번 법정물은 반응이 어떤가.

"괜찮은 편이다. 출간 한 달이 안 돼 초판 2000부가 모두 소진됐다. 영화사 두어 군데서 연락이 왔다고 들었다."

―작품 아이디어는 판결을 맡았던 사건에서 얻나.

"전혀 그렇지 않다. 등장 인물 이름을 짓다가 사건 당사자와 비슷하기만 해도 바꿔 버린다. 다만 법정에서 본 인간 군상의 모습을 차용하는 경우는 있다."

―트릭을 풀어 범인을 찾아내는 본격 추리물을 추구하는 이유는.

"요즘 유행하는 사회파 추리물은 범행 동기나 사회적 배경에 치중한다. 형사사건인 셈이다. 처절하고 리얼한 사회파 사건을 주중에 일하면서 접하는데 주말까지 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판사라는 직업 덕에 작품 수준 이상의 후광효과를 본다고 생각하지 않나.

"처음에 그런 비판이 좀 있었다. 그걸 극복하려고 문장 같은 것도 더 신경 쓰려 노력했다. 그런데 판매량을 보면 후광효과가 전혀 없는 것 같다. '별난 놈이 있네' 하고 관심은 가져주는데 책을 사지는 않더라.(웃음)"

―추리소설은 말초적인 자극을 줄 뿐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적 유희가 추리소설의 첫 번째 가치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재미'라는 게 큰 무기다. 나는 메시지가 재미 안에 녹아들어야 전달이 잘된다고 생각한다. 주성치 나오는 '서유기―선리기연'이 내 '인생 영화'다. 코미디인데 마지막에 어마어마한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는 데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다가 인생의 의미가 전달이 돼 버리는 거다."

―쓴다는 것의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 후반부에 생계를 넘어선 삶의 의미가 하나 생긴 것 같다. 데뷔 초기엔 일본 추리물과 경쟁한다는 치기 어린 생각도 했는데 지금은 소수의 독자만이라도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명탐정 캐릭터가 있다는 걸 알아준다면 만족한다. '크라잉 프리맨' 같은 일본 만화가 우수수 쏟아질 때 '아, 재미있다' 하면서도 내가 더 좋아했던 건 고행석의 구영탄 시리즈였다. 스토리는 엉성하지만 우리 감성엔 더 와 닿았다. 나중에 한국 추리소설사에 이 무렵 도진기라는 작가가 나와서 괜찮은 걸 썼다고 기록됐으면 좋겠다."

―결국 오래 기억되는 게 목표인가.

"그렇다, 미국 추리작가 반 다인은 원래 윌리엄 헌팅턴 라이트라는 평론가다. 평론가로서는 잊혔지만 추리소설가로서는 살아남았다. 내가 심각한 글을 쓴다면 다 폐기되겠지만 내가 쓴 재미있는 소설들은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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