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여성 유공자] 학도병으로 화천서 北 희천까지.. 찢어진 교복치마 입고 전장 누벼

신혜정 2016. 6. 2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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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 자원한 함명숙씨

두려워하는 민간인 위무 담당

감자-수수떡 갖다 주며 지원군 돼

총도 받지 못했던 여자 학도병

살아 남으려 필사적으로 숨기도

6ㆍ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전장을 누볐던 함명숙씨가 호국영웅기장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신재훈 인턴기자(세종대 광전자공학과 4) /2016-06-24(한국일보)

“계옥이, 원순이. 참 똑똑하고 착한 친구들이었는데….”

24일 만난 함명숙(82)씨가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66년 전 음악실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를 함께 듣던 동무들은 이제 그의 곁에 없다. 열 여섯 어린 나이에 함께 학도병에 자원했던 용기 있는 소녀들이었다. 함씨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두 친구가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극은 그렇게 소녀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1950년 6ㆍ25전쟁 발발 당시 강원 춘천여고 1학년이었던 함씨는 그 해 9월 말 6사단 학도병이 됐다.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하던 때였다. 교련선생님은 ‘일주일 간 전방부대의 취사를 도와야 하는데 자원할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망설이던 함씨는 ‘여자도 조국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어머니 말에 용기를 냈다. 뜻하지 않게 시작된 군 생활은 1ㆍ4 후퇴 직전인 12월까지 계속됐다.

여자 학도병들의 주 업무는 민간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피아 식별이 어려운 가혹한 환경에서 일반 시민들은 몸을 숨긴 채 두려움에 떠는 게 고작이었다. 함씨는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학도병들이 끌어안은 사람들은 하루 한 끼도 먹기 힘들었던 부대원들에게 감자와 수수떡을 갖다 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북진하는 동안 그는 매일 죽음의 길을 걸었다. 강원 화천군에서 시작된 행군은 북한 자강도 희천까지 이어졌다. 북한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습격해 왔다. 남자 학도병들과 달리 총기가 지급되지 않았던 여자 학도병들은 살아 남으려 필사적으로 숨었다. 함씨는 “찢어진 교복치마를 갈아입지도 못한 채 시체 가득한 길을 지나갔다”고 했다. 수많은 죽음 중 그는 국군에 붙잡혀 처형 당한 북한군의 눈망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젊은 군인은 처형 직전 자신을 겨냥한 총구를 마주하고 함씨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눈을 감으면 그 사람의 눈빛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같은 민족끼리 왜 그토록 총부리를 겨눠야 했을까요?”

중공군이 무서운 속도로 반격해 오던 50년 12월, 함씨는 전투병이던 사촌오빠의 도움으로 보급품 트럭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부대원들은 포로가 됐고 친구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이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다. 피난 다니다 집이 없어져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도 학업을 놓지 않고 대학까지 마쳤다. 여자든 남자든 살아남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학도병 시절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덧 장성한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된 함씨는 지금의 열 여섯 소녀들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했다.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는 신념을 가지면 세상에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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