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중풍으로 잃어버린 언어, 그림으로 대신해요"

2016. 6.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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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소설가 김승옥씨, 7월 작품 전시회
[동아일보]
‘무진기행’의 소설가 김승옥 씨가 최근 경기 파주출판단지에서 뇌중풍과 싸우면서도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파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단편소설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으로 1960년대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던 소설가 김승옥 씨(75). 한글 1세대 소설가로 도시인의 일상과 일탈, 산업 사회의 모순, 인간의 상실감 등을 그려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절필을 선언한 뒤 작품 활동을 사실상 중단했다. 그런 김 씨가 다음 달 서울 종로구 혜화아트센터에서 그림전을 열고 화집을 출간한다. 최근 경기 파주출판단지에서 그를 만났다.

‘말·글 안 됩니다(뇌졸중).’

희끗한 머리에 점퍼 차림으로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나타난 김 씨는 테이블 위의 A4 용지에 이렇게 썼다. 그러고 선한 웃음을 지으며 종이를 내어 보였다.

그는 세종대 국문과 교수였던 2003년 오랜 친구인 소설가 이문구 씨의 별세 소식을 듣고 집을 나섰다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교수직을 관두고 치료에 들어가 기적적으로 병을 이겨냈지만 소설가에게 무기나 다름없는 언어 능력을 잃었다. 거동에 불편함은 없지만 기본적인 의사소통 정도만 가능해 인터뷰도 필담으로 했다.

“이번에 전시할 그림은 뇌졸중 투병 중 그린 수채화예요. 2009년 한 문예지에 그림을 실은 걸 계기로 다시 그림을 그려봤죠. 서울과 전라도 경상도 등지를 다니며 풍경을 담았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와 그리기도 했고요.”

김승옥 씨가 그린 전남 순천만 습지의 갈대밭 풍경 수채화.김승옥 씨 제공
김 씨는 ‘무진기행’의 배경이 된 전남 순천과 서울을 오가며 지낸다. 2010년 순천문학관에 김승옥관이 개관하면서 일주일에 2, 3일은 문학관에 머문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엔 순천의 자연이 유독 많이 담겨 있다.

그는 “문학관에선 주로 TV를 보거나 방문객을 만나고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어떻게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됐느냐고 물으니 그는 이젤 앞에 서 있는 어른과 아이의 모습을 그려 보였다.

“1952년 순천북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본인 선교사에게 그림을 배웠죠.”

실제로 자신의 단편소설 ‘차나 한 잔’의 주인공이 신문사에 만화를 연재한 것처럼 대학생 때 서울경제신문에 시사만화인 ‘파고다 영감’을 싣기도 했다.

이번 전시의 다리는 카피라이터 이만재 씨가 놔주었다. “이만재 씨에게 그림을 몇 점 보냈고, 마침 이 씨 집에 놀러온 출판사 직원(21세기북스의 함성주 씨)이 그림을 보고 제게 연락을 해왔지요.”

김 씨의 소설은 최근 필사 열풍이 부는 등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고 있다. 출판사는 전시회를 앞두고 크라우드 펀딩도 벌이고 있다. 팬들은 4000만 원을 보탰다. 전시회 수익금도 김 씨 후원에 쓰인다.

현재 인세가 들어오지만 치료비 부담이 커서 김 씨는 경기 고양시 일산집을 처분하고 장인이 살던 서울 집으로 이사했다.

팬들에게 하고픈 말을 묻자 그는 ‘소설=신+악마’, ‘악마→신(부끄러움)’이라고 적었다. 뜻을 되묻자 김 씨는 무진기행 책을 펼쳐 마지막 문장인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에 밑줄을 친 뒤 ‘신!’이라고 적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인공이 자신의 속물성과 무기력 등을 자각한 부분으로 소설엔 신과 악마의 모습이 담겨 있으며, 악마가 부끄러움을 아는 순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뇌중풍으로 쓰러지기 전부터 신학을 공부하며 기독교에 몰두한 그는 “언젠가 스리랑카에 선교를 하러 꼭 가고 싶다”고 했다. 작품 활동을 재개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인터뷰 내내 필담 이외에는 “그렇지” “아니야” “그때” 정도만 내뱉던 그가 이 질문을 받고 처음으로 다른 말을 했다. “혹시”라는 단어였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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