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박물관 DNA 품은 박물관 代父의 딸

곽아람 기자 2016. 6. 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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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아람 기자의 캔버스] 서울대 퇴임 앞둔 김영나 前국립중앙박물관장 학자로서 반대했던 佛 명품展.. 무산 뒤 전격 경질돼

김영나(65) 전(前) 국립중앙박물관장(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은 명실공히 '박물관의 딸'이다. 그의 아버지인 고고학자 김재원(1909~1990) 박사는 한국 박물관의 대부(代父)로 불린다. 초대(初代)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1945년부터 1970년까지 25년간 봉직했다. 광복과 미 군정(軍政), 6·25 전쟁 등의 혼란 속에서 박물관 유물을 지키고 키워냈다. 전화를 받을 때면 늘 "박물관입니다"라고 답해 친구들로부터 "아, 당신이 박물관이오?" 하는 핀잔을 들을 정도였다. 김영나는 김재원 박사의 1남 3녀 중 막내다. 2011년 2월부터 지난 3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있었다.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서울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는 그를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 자택에서 만났다. 관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 첫 언론 인터뷰다.

박물관집 막내딸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좌대(座臺) 위에 놓인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똑같이 생겼는데 크기가 약간 작았다. "조각가 이종각씨가 국보를 본떠 만들었는데 1970년대부터 우리 집에 있었어요. 같은 작품이 여섯 점 있는데 아버지가 그중 석 점을 사서 세 딸에게 한 점씩 주셨지요." 일단 아버지 얘기부터 하기로 했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함경남도 큰 지주(地主)의 아들이었는데 남자들이 다 일찍 죽는 집안으로 유명했어요.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여섯 살 때 할머니가 개가(改嫁)를 했어요. 부모 없이 고아처럼 자랐지요. 아버지가 독일 유학을 했는데 그것도 어느 점쟁이가 '어디 멀리 가면 이 지역 신령이 '없나 보다' 하고 잊어버릴 테니 멀리 가 있다가 한참 후에 오라'고 해서 간 거예요. 유럽서 공부하신 데다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라 당시 한국의 일반적인 아버지들에 비해 가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어요. 약주도 못 하니 다섯 시 땡 하면 집에 오셨지요."

박물관과 함께 나고 자란 인생이었다. 김영나는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50년 겨울 국립중앙박물관이 미군 열차에 소장품을 실어 부산으로 옮긴 후 가족이 부산서 피란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서울로 돌아온 것은 1953년 가을, 박물관이 예장동의 한 건물로 들어가면서 그의 가족도 남산 인근에 집을 얻었다. 군인들이 예장동 박물관 건물을 연합참모본부로 쓰겠다고 하면서 박물관은 1955년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갔다.

―어릴 때 덕수궁 박물관에 자주 놀러갔다고 들었습니다.

"덕수궁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곤 했어요. 스케이트를 타고 나면 아버지 사무실에 가서 점심도 먹고 전시장도 돌아다니고 그랬어요. 당시 박물관 입구 로비에 놓여 있던 고려시대 철불 앞에서 사람들이 지폐를 놓고 합장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댁에 문화계 인사들도 많이 찾아왔다고요.

"그랬지요. 샹바르라는 프랑스 대사, 헤르츠라는 독일 대사가 자주 오셨죠. 아버지가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해 외교관들과 친분이 깊었어요. 당시엔 제대로 된 한식당이 없어서 중요한 외국 손님들은 우리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어요."

―댁에서 파티를 한 셈이네요.

"네. 어머니가 남대문시장에서 재료를 사 오면 일하는 아주머니와 언니들이 동원되었어요. 가끔 음식 솜씨 좋은 김원용 선생님(한국 고고학계의 태두) 사모님하고 최순우 선생님(국립중앙박물관 제4대 관장) 사모님도 도우러 오셨어요. 언니들은 생선전을 부치고요. 음식은 요즘 한정식 코스처럼 했어요. 잡채를 먼저 들여가고, 그 후 생선전, 다음엔 도미 튀김, 불고기나 신선로, 그리고 후식 이런 순서였는데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가 음식 나르는 역할을 맡았어요. 아버지의 그런 외교적인 친분 덕에 당시 박물관에는 돈이 없었지만 외국 재단을 통해 출판비 등의 지원을 많이 받았어요.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신조였는데 그 친분을 통해 제자들의 해외 유학도 많이 주선했지요. 록펠러 재단을 통해 김원용 선생 뉴욕대 유학을 가도록 하신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첫 父女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영나는 2011년 최광식 관장 후임으로 제11대 국립중앙박물관장 직을 맡게 된다. "의외의 인사(人事)"라는 평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물은 대부분 한국·아시아 것인데 김영나의 전공은 서양미술사, 그중에서도 서양 근현대 미술사이기 때문이다. 불교미술사 전공자인 그의 큰언니 김리나 전 홍익대 교수와 혹시 바뀐 것이 아니냐는 농담도 나왔다.

―어떻게 국립중앙박물관장 직을 맡게 된 겁니까?

"그해 2월 7일에 갑자기 전화 연락이 왔어요. 3주 전쯤 정부 관계 일로 신원조회를 해도 되겠느냐는 연락을 받긴 했는데 무슨 일인지 짐작도 못 했어요."

―추천한 사람이 있나요.

"당시 서울대학교 오연천 총장이 추천하셨다고 들었어요. 아마 제가 서울대 박물관장을 해서 그러신 것 같아요. 나중에 임명장 받을 때 이명박 대통령께서 아버지가 초대 관장이었다는 사실은 임명 후 신문 기사를 보고 알았다고 했어요."

―MB와는 그전에 인연이 없었습니까.

"전혀 없어요. 만난 적도 없었어요."

―서양미술사 전공자라 걸맞지 않다는 말이 많았습니다.

"박물관 규모가 작아 관장이 학예직 일도 맡아서 해야 하는 경우엔 관장 전공이 중요할지도 몰라요. 우리 박물관같이 규모가 큰 경우 관장이 하는 일이란 박물관 운영이라든가 예산을 따 와 집행한다든가 하는 전체적 방향을 정하는 겁니다. 글렌 로리 뉴욕현대미술관장의 전공은 이슬람 미술이에요. 게다가 사람들이 저를 서양미술사 전공자라고만 생각하는데 1990년대부터 제 연구는 한국 근대미술사였어요."

―학교에만 있다가 큰 조직을 운영하려니 힘들지 않았습니까.

“그다지 힘들지 않았어요. 학예직에 있던 많은 사람이 예전에 내게 배운 적이 있었어요. 게다가 박물관이라는 곳은 내게 익숙한 곳이었어요. 내가 모르는 무슨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 아니잖아요. ‘아, 이 박물관을 자랑스러운 곳으로 키우는 데 내가 힘이 돼야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부녀(父女) 관장이라고 해서 주목을 많이 받았는데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나요.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아버지와 내 시대는 다르니까 내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 이 박물관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고만 생각했어요.”

―가장 히트친 전시는 뭔가요.

“2014년 했던 오르세 미술관전인데 40만명 정도 관람객이 들었어요. 그런데 비판을 많이 받았어요.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인상주의 블록버스터 전시를 열어 사람을 끌어모으려 한다고들 했어요. 그렇지만 그 전시의 핵심은 근대성이었어요. 실제 인상주의 작품은 굉장히 제한됐고 인상주의가 나오기 전까지의 근대화 과정에 중점을 맞췄는데 그 부분이 관람객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어요.”

―관장 시절 어떤 점에서 보람을 느꼈습니까.

“박물관에 대해 ‘무겁다’ ‘공부하는 곳이다’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는 재미있는 박물관, 언제 와도 또 오고 싶은 박물관을 만들고 싶었어요. 편의시설을 쾌적하게 고치고 전시실도 관람하기 편하게 보수하고 디스플레이에도 신경을 썼죠. 그래서 관람객들이 전시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어요.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동유럽, 이슬람, 비서구 지역으로 전시를 확장하기도 했지요. 다양한 전시를 보여주니 젊은 관람객층이 두꺼워졌어요.”

김영나는 지난 3월 9일 박물관장 직에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인사였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차관급 정무직이라 정해진 임기는 없다. 그러나 사전예고 없이 전격 교체됐다는 점에서 사실상 경질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박물관 안팎에선 “루이뷔통 같은 회사와 협업해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으로 열리려다 무산된 ‘프랑스 장식 미술전’ 개최를 반대한 것이 정부 고위 관료와 프랑스 측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김영나는 이 건에 대해서 말을 무척 아꼈다.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물건을 국립박물관에서 전시하는 건 ‘학자의 양심’상 곤란하다고 했다던데 사실입니까.

“그건 사실이에요. 이제 다 끝난 이야기이니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죠.”

언니 같은 선생님

김영나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1980년 덕성여대 서양화과 교수로 임용되며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걷는다. 80년대 초 어느 날 서울대에 출강하면서, 그의 첫 미술사 수업이 끝나자 뒤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나가면서 “무슨 미술사 수업이 이래?” 라고 수군댔다. ‘미(美)란 무엇인가’ 같은 개념 위주 미술사 수업이 주류였던 대학가에서 슬라이드로 작품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그의 미국식 강의는 낯설고 신선했다. 김영나는 “암막 커튼이 있는 강의실이 없어서 검은 종이로 창문을 가리고 수업했다”고 말했다. 1995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로 옮겼다. 앳된 외모, 애교스러운 말투의 그를 학생들은 ‘영나 언니’란 애칭으로 부르며 친근하게 여겼다. 국내에서 서양미술사의 체계를 다지고 평론가들의 영역이던 한국 근대미술사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 학자로서 대표적인 그의 성취로 꼽힌다.

―경기여고 졸업하고 1970년에 미국 뮬렌버그대로 유학을 가셨죠. 왜 유학을 가셨나요?

“(깔깔 웃으며) 서울대 불문과 시험쳤다가 떨어졌으니까요. 당시 아버지가 정년퇴임하고 뮬렌버그대 방문학자로 1년간 가기로 돼 있었는데 ‘나랑 같이 가자’ 하셨어요. 그래서 재수할 생각을 하지 않았죠.”

―미국에서 처음엔 사회학과로 입학했는데요.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누군가 기자 하려면 사회학과에 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왜 미술사로 전향한 건가요?

“미술사가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역사학인데 문서 기록에 그치지 않고 시각적 감동을 준다는 점이 좋았지요. 많은 사람이 미술사라고 하면 미술 감상 비슷하게 생각하는데 미술사가는 작품을 볼 때 시대의 전체적인 배경을 봅니다. 작가가 생각하지 않은 시대상이 작품에 은연중에 반영될 수도 있어요. 그렇게 여러 가지가 얽힌 이야기가 항상 재밌었어요.”

―아버님이 권유했습니까.

“아니에요. 큰언니에겐 ‘한국에 미술사학자가 별로 없다’며 미술사 하라고 시켰지만 제게는 그런 건 없었어요. 제가 하다 보니 재미있다 싶어서 하게 된 거죠. 그렇지만 아버지는 제가 미술사를 한다니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특히 서양미술사를 한다니 반기셨죠. 제가 귀국한 후에 여기저기서 강의를 하면 다 들으러 오셨어요.”

―유학 생활은 어땠습니까.

“미국 대학에 가니 나는 아시아에서 온 영어가 서툰 학생에 불과했어요. 거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분이었지요. 생각해 보니 미국 애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한 거예요. 미국 애들은 스키 타고 댄스 파티도 가고 하는데 나는 그런 거 하나도 못 해봤어요.” 그는 학부를 우등졸업한 후 전액장학금을 받고 오하이오주립대 대학원에 진학한다.

―결혼은 안 한 이유가 있습니까.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 1980년에 귀국했을 때 내 사고방식이 굉장히 미국식이었어요. 그래서 한국 남자들과 잘 안 맞았던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남자들이 굉장히 보수적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여자의 인생이 남자에 의해 좌우되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확고했어요. 얼굴은 안 그렇게 생겼는데 머릿속은 그랬던 거죠.”

―아버지는 국립중앙박물관장, 어머니는 의사, 큰언니와 오빠는 교수, 작은언니도 의사…. 게다가 그 시절에 미국 유학이라니 소위 ‘금수저’였군요.

“경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도 국립보건원에 다니셨기 때문에 공무원이었어요. 언니도 저도 다 장학금 덕에 유학했지요. 다만 자식에 대한 사랑과 관심, 지원에서는 우리 부모님이 최고의 부모라고 생각해요.”

―유명한 학자의 딸이라는 게 같은 학자로서 득실(得失)이 있지 않나요?

“친척들이 ‘네가 교수가 된 건 다 아버지 덕이다’라고들 많이 얘기했지요. ‘나도 노력은 했는데 왜 내가 노력한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끔 해보긴 했어요.”

평상심의 힘

―교직에 있던 지난 36년간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한 건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싫어한 건 임기응변이에요. 머리 좋은 학생들의 경우 재주를 믿고 슬쩍 넘어가려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굉장히 싫어했지요. 학생들에게 ‘항상 성실하게 해야 한다’고 했어요.”

―대학가에서 데모가 일상이던 80년대에도 휴강이라곤 하지 않았다던데요.

“10년간 미국에 있을 동안 한 번도 교수가 휴강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 제자들이 어디 가서 휴강했단 소리를 들으면 상당히 기분 나빠요. 나는 그렇게 안 가르쳤는데 말이죠. 80년대에도 그랬어요. 데모와 수업은 별개니 수업은 듣고 데모는 따로 하라고 했어요. 학생들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교수가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거였어요.”

―몸이 아파도 휴강하지 않았습니까.

“(웃으며) 사실 아픈 적이 별로 없어요. 강의를 많이 하니 목이 아파서 마이크를 쓴다든지 앉아서 수업한다든지 한 적은 있었는데 아파서 학교를 못 가겠다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단,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엔 휴강했지요.”

세 시간 마주 앉아 있는 동안 그는 한 번도 “힘들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질문에도 “나는 괜찮았어요”라고 답했다. 목소리는 쾌활했고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명랑하고 긍정적인 건 천성인가요.

“사람들이 내 외모만 보면 내면이 강하다는 생각을 잘 안 해요. 나는 미국에서 혼자 공부하고 살면서 상당히 강해졌어요. 20대의 그 10년간이 일생을 좌우하게 되었어요. 다음엔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같은 게 생긴 거죠.”

―인생에 고난이라든가 역경 같은 것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나는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안 해요.”

―힘든 일은 혼자 견딘다는 건가요?

“그래요. 내가 말해봤자 상대가 내가 생각한 만큼 뭐…. 미국에 10년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봤어요. 그러고 나서 서울에 오니까 판단력 같은 게 생겼어요. 세상이란 게 다 좋고 그런 건 아니라는 거 말이죠. 사기꾼도 있고 이상한 사람들도 많거든요. 그 20대의 경험이, 내가 직접 겪었든 간접 경험을 했든 세상이 녹록지 않다고 생각하게 했어요.”

동료 미술사학자인 이은기 목원대 교수가 김영나의 정년퇴임 기념 문집에 이렇게 썼다. “태어난 여건, 공부한 여건, 훌륭한 저서, 서울대 교수, 국립중앙박물관장 등등 모두 부럽지만, 그중 가장 부러운 건 김영나 관장의 평상심이다. 그리고 바로 이 평상심이 그녀의 좋은 여건에 행운의 날개를 달아준 숨은 비결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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