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場의 클래식에 장병들 눈물.. 병동서 연주할땐 내가 오열"

2016. 6. 1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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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특별한 손님'] 6·25 참전 세계적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 23일 방한
[동아일보]
4월 한국에서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원제 Seymour: An Introduction)의 주인공 시모어(세이모어) 번스타인 씨(89·사진)는 천재 피아니스트다. 3세 때 처음 피아노를 만났고 15세 땐 남을 가르치는 경지에 올랐다. 한창 활동할 때 ‘피아노를 정복한 피아니스트’란 찬사를 들었다.

번스타인 씨는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배운, 바로 그 순간부터 나의 진정한 인생이 시작됐다. 피아노는 내가 살아가는 수단(직업)이 아니라 내 삶 그 자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영화에서 자신의 한국전쟁(1950∼1953년) 참전기를 3분가량 회고한다. “부대장에게 ‘클래식 연주로 최전방의 병사들을 위문하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전쟁터에서 누가 클래식을 듣겠느냐’며 반대하더군요. ‘시도만 한번 해보자’고 해서 간신히 허락받았습니다. 그렇게 최전선에서 위문공연이 시작됐습니다.”
위문공연 당시의 번스타인 4월 한국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의 주인공 시모어(세이모어) 번스타인 씨(가운데 앉은 사람)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최전선에서 100회 이상 클래식 위문공연을 했다. 시모어 번스타인 씨 제공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그는 총 대신 악기를 들었다. 영화를 관람한 임연철 건양대 교수는 “수십만의 한국전 참전 미군 중 휴전 후 미국으로 돌아가 여러 분야에서 큰 공적을 남긴 사람이 많지만 음악인으로서는 번스타인이 거의 유일한 인물인 것 같다”고 말했다.

번스타인 씨는 한국 정부 초청으로 이달 23∼29일 방한한다. 피아노 레슨은 주로 뉴욕에서 하지만 여름철엔 북동부 메인 주 자택에서 지낸다는 그를 10일 오후(현지 시간) 1시간 동안 전화로 인터뷰했다.
―한국에 얼마 만에 가는 건가요. “1970년대 방한한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40여 년 만이네요. 박근혜 대통령 이름이 적힌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방한 중에 박 대통령과 참전 용사들이 참석한 기념행사에서 소감도 밝히고 피아노곡도 연주합니다. 전쟁터에서 제 연주를 들었던 분들을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너무 설레고 흥분됩니다.”
―한국전에 참전한 첫날을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1951년 4월 24일이었습니다. 14주 군사훈련을 받고 14일간 배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한 날입니다. 철모를 쓰고 소총을 든 채 배 갑판에 앉아 있었죠. 당시 제 느낌은 ‘이보다 더 두렵고,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또 있을까’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모습은 어땠나요.“인천에서 대구로 기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포탄 맞은 산야는 황폐하고, 사람들은 정말 가난하고 절망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솔직히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인터뷰 도중 “내가 그런 나라를 돕기 위해, 그런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싸웠다는 게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 나라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 중 하나가 돼 있다는 사실에 더욱 자랑스럽다”고 서너 차례나 말했다.
―영화에서 “한국전쟁 당시 적어놓은 일기장을 보면서 하루 종일 눈물 흘린 적도 있다”고 말하면서 또 눈물을 보였습니다. 일기장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나요. “당시 최전선에서 100회 넘게 클래식 위문공연을 했습니다. 언제 적군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니 악기 옆에 늘 소총을 놔뒀습니다. 최전선 청중(군인)은 연주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어요.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연주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얘기를 더 하기가 힘드네요….”

그는 1960년에도 피아노 연주와 레슨을 위해, 1970년대(정확한 연도는 기억 못 함)에는 자신의 책 한국어판 발간을 기념해 방한했다. “저 스스로 ‘나와 한국의 인연은 정말 특별하다’고 느낍니다. 1960년 방한했을 때 4·19혁명이 터져 모든 공연이 취소됐어요. 저와 같이 공연하기로 했던 월터 매카너기 당시 주한 미국대사(클라리넷 담당)에게 ‘나를 데모하다가 부상당한 학생들이 있는 병실로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고 병원에서 그들을 위해 연주했습니다. 우리(미국 시민)는 민주주의를 위해 항거하는 당신(학생)들의 편임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거든요.”

그는 “1970년대 한국에 왔을 때 이미 ‘한국이 뉴욕만큼 발전했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처음 본 한국이 전쟁의 폐허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에게 “지금의 서울과 한국은 1970년대 모습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해줬다. 방한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그에게 ‘그가 무기(소총)와 악기(피아노)로 지켜낸 한국의 21세기 모습이 어땠는지’는 꼭 물어보고 싶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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