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위에선 챔피언.. 링 밖에선 자유의 투사

민학수 기자 2016. 6. 6.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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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파킨슨병과 32년 싸우다 숨져] 흑인으로서 당하는 차별에 격분.. 올림픽 금메달 강에 던져버려 3차례나 헤비급 챔피언 올라 "나비처럼 날아서.." 숱한 어록 베트남戰 징집 거부 큰 파장 "베트콩은 검둥이라고 안 부르니.." 북한에서도.. 트럼프에게도.. 거침없는 비판으로 주목받아

복싱 경기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도 신화(神話)처럼 살다 간 그의 이 한마디는 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 20세기 최고의 복서이자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전 등 격동하는 미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영원한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74)가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그의 대변인 밥 거닐은 지난 4일(한국 시각) 성명을 통해 "32년 동안 파킨슨병을 앓았던 알리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최근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의료기관에서 생명보조 장치에 의존하던 알리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3차례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던 그는 은퇴 3년 만인 1984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1985년 레바논과 1991년 이라크에서 미국인 인질 석방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유엔개발계획(UNDP) 친선대사로 활동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최종 성화 주자로 나서 떨리는 손으로 점화를 해 세계를 감동시켰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고인은 옳은 일을 위해 싸운 사람"이라며 "(마틴 루서) 킹 목사와 (넬슨) 만델라와 함께 섰고, 다른 사람들이 꺼릴 때 앞에 나섰다"고 했다.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는 "링 안에서는 챔피언, 링 밖에서는 영웅"이었다고 알리의 삶을 압축했다. 알리는 1942년 미국의 남부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나 인종차별과 가난의 이중 굴레 속에 자랐다. 본명은 캐시어스 클레이였다. 열두 살 때 자전거를 도둑맞고 찾아간 경찰서에서 "자전거 도둑을 혼내 주려면 복싱을 배워보라"던 형사의 말에 복싱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빠른 주먹과 현란한 발놀림으로 알리는 열여덟이던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을 땄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식당 출입을 거절당하고, 백인 갱들에게 위협을 받았다. 알리는 "미국을 대표해 금메달을 따냈다고 생각했던 환상이 사라졌다"고 울부짖었다.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린 알리는 프로 무대로 뛰어들었다. 그는 '복싱 가운을 입은 계관시인' '떠버리 알리'란 평을 들을 정도로 숱한 화제의 발언을 쏟아내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1964년 2월 헤비급 챔피언 소니 리스턴에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링 위에 오른 뒤 7라운드 TKO승을 거두고는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급진적 흑인민권 운동가 맬컴 X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본명이 "노예의 이름"이라며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나는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이 없고 백인과 결혼할 생각도 없다. 난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알리의 1967년 베트남전 징집 거부는 미국 사회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파장이 컸다. 징집영장을 받고 "베트콩은 나를 검둥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데 내가 왜 총을 쏴야 하느냐"고 했던 알리는 법정에서 "난 흑인이라는 이유로 이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남의 자유를 위해 싸울 순 없다"고 외쳤다. 타이틀을 박탈당한 알리는 3년간 링에 오르지 못했다. 알리는 1974년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샤에서 조지 포먼을 8회 KO로 누르고 세계 챔피언에 복귀했다. 1981년 39세의 나이로 링을 떠났다. 3차례 헤비급 챔피언과 19차례의 방어전 승리, 통산 전적 56승(37KO) 5패를 남겼다. 그는 은퇴 회견에서 "자유와 정의, 평등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는 "신이 이 세상 최고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점을 알려주시려고 나한테 이런 병을 주신 것 같다"고 했다.

알리는 어디서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말은 했다. 1995년 평양에서 열린 스포츠 행사에서 당시 북한 관리가 "북한이 도덕적으로 (미국보다) 우월하고, 우리가 원하면 미국과 일본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자 "우리가 이 후레자식들을 증오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고 받아쳤다. 함께 방북했던 프로레슬러의 증언이다. 미국 언론인 돈 커크는 "알리는 데니스 로드먼 등과 달리 북한 정권을 전혀 칭송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200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말 그는 미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무슬림 입국 금지' 발언에 대해 "정치 지도자는 이슬람교를 이해하도록 하는 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의 마지막 공식 발언이었다.

7남 2녀를 둔 알리는 1986년 재혼한 4번째 부인 로니와 함께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장례식은 10일 고향인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치러진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추도사를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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