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영웅기장 받은 6·25 참전유공자 김금자 여사

입력 2016. 6. 3.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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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미군서 군무원으로.."나라 위해 큰일 한 것도 아닌데"
오진영 대구지방보훈청장(왼쪽)이 김금자 여사(오른쪽)에게 호국영웅기장을 수여하는 모습

공군·미군서 군무원으로…"나라 위해 큰일 한 것도 아닌데"

(대구=연합뉴스) 김용민 기자 =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영광을 안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3일 오진영 대구지방보훈청장이 건넨 호국영웅기장을 받은 김금자(81) 여사는 "나라를 지키다 세상을 떠난 분들께 미안할 뿐이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공군본부와 미군에서 군무원 생활을 한 뒤 지금껏 50년 넘게 가정주부로 산 김 여사는 작년 8월 보훈청 도움으로 참전유공자 등록을 했다.

그는 군인으로 직접 전투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참전유공자 등록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보훈청이 증빙 자료와 관련자 증언을 바탕으로 김 여사 공적을 발굴해 참전유공자로 등록하고 이번에 호국영웅기장을 수여했다.

1935년 대구에서 3남 1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난 김 여사는 중학교 2학년 때 6·25가 발발해 경남 함안으로 피난 갔다.

2년쯤 뒤 대구로 돌아온 그는 공군본부에서 일하던 친구 권유로 1953년 3월부터 공군에서 근무했다.

손재주가 좋아 타이핑 실력이 뛰어났고 공군 관계자가 이 점을 높이 샀다고 한다.

김 여사는 당시 대구에 있던 공군본부에서 작전편성표 작성, 타자 등 행정업무를 수행했다.

뒷날 공군참모총장이 된 김신 장군(지난달 작고) 비서실이 그의 근무처였다.

전쟁 중이라 업무가 많다 보니 야근도 많고 생명의 위험도 적잖이 느꼈으나 여자 몸으로 나라를 지키는 일에 보탬이 되자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당시 상관으로 모시던 김신 장군은 백범 선생의 아들답게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김 여사는 "매일 출퇴근 때 인사를 올렸을 뿐 말씀 한 번 나누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공군본부와 인연도 잠시뿐 휴전 뒤 김 여사는 대구에 있던 미군 부대로 일터를 옮겨 10년가량 군무원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같은 부대서 일하던 남편(2002년 작고)을 만나 결혼한 뒤 직장을 나와 3남 2녀의 자식을 낳아 키웠다.

아들과 딸을 교수, 박사, 피아니스트, 치과의사 등으로 키워낸 김 여사는 이 모든 게 국난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분들 덕분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공군본부에서 일할 때 매일 보던 여성 비행기 조종사 등 많은 분이 생각난다"며 "그런 분이 있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나와 내 가족, 이웃이 살아갈 수 있었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yongm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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