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판 콩나물, 지구 두바퀴는 감을 것"

강화/이태동 기자 2016. 5. 2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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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세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 16년간 콩나물 키워 장애인 도와] 장애인 생활 공동체 '우리마을' 강화도에 만들어 촌장 맡아 "요람서 무덤까지 돌봐줘야죠.. 콩나물은 그 의지의 표현"

"제주도·강화도산(産) 무공해 콩으로 만들었으니 이거야말로 훌륭한 건강식품 아닙니까."

19일 낮 인천 강화군 '우리마을' 사무실 앞. '촌장'이라고 적힌 초록색 야구 모자를 쓴 김성수(86) 대한성공회 주교가 콩나물 한 봉지를 들고 열띤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봉지 겉엔 '무농약' '국산'이라는 글자와 유명 식품 회사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김 주교는 "수년째 이 업체에서 정기적으로 사가는 걸 보면 품질은 확실히 인정받은 것 아니냐"며 "6~7년 동안 팔았던 8㎝짜리 콩나물을 꼬리부터 머리까지 다 합치면 지구를 두 바퀴 감고도 남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성공회의 거목(巨木) 김성수 주교가 '콩나물 전도사'로 뛰고 있다. 그는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을 맡았고, 성공회대학교 3·4대 총장으로 일한 종교계 원로다. 그런 그가 요즘 찾아오는 사람마다 붙잡고 "우리 콩나물 구경 좀 하시라"며 봉지를 내놓는다. 김 주교를 돕는 천용욱 신부는 "김 주교님이 높은 연세인데도 물불 안 가리시고 '콩나물 홍보'에 나서시니 건강이 걱정될 정도"라고 했다.

김 주교가 이렇게 콩나물 판매에 팔을 걷어붙이고 뛰어든 것은 자신이 촌장으로 있는 '우리마을'의 발달 장애인들을 위해서다. '우리마을'은 2000년 김 주교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내놓아 만든 장애인 근로 시설이자 생활 공동체다. 1~3급 발달 장애인 60여명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콩나물, 고구마, 감자 같은 채소를 기르거나 전기 제품을 조립한다. 콩나물 작업장에선 비교적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20여명이 각자 역할에 따라 콩나물에 물을 주고 씻고 닦고 포장해서 나르는 일을 한다.

김 주교는 "반복된 작업은 비(非)장애인과도 차이가 없다"며 "수동 포장할 때 보면 콩나물 한 봉지 분량인 200g을 한 주먹에 맞추는 도사들이 많다"고 했다.

그가 발달 장애인과 인연을 맺은 것은 40여년 전이다. 신부(神父) 시절이던 197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생소한 분야인 발달 장애인 시설을 김 주교가 처음으로 맡게 됐다. 그는 당시 성공회대로부터 건물을 제공받아 '성베드로 학교'를 만들었다. 1974년 초등학교 과정으로 시작한 이 학교에는 현재 대학 수준의 '전문반' 과정까지 생겼다.

강화도의 '우리마을'은 학교 교육과정이 끝난 다음 단계에 해당한다. 김 주교는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졸업하면 갈 곳 없어 다시 집 안 구석으로 숨어드는 일이 반복됐다"며 "그래서 만든 게 지금의 직업 공동체 시설"이라고 했다. 성베드로학교를 나와 우리마을에서 숙식하며 일하는 장애인 박모(36)씨는 "촌장 할아버지가 '네가 최고다. 너도 다른 사람처럼 해낼 수 있다'고 하셔서 그 말씀대로 따라오다 보니 직업도 얻고 친구도 생겨 행복하다"고 했다.

2010년부터 아예 우리마을에서 지내고 있는 김 주교는 최근 발달 장애인들의 노후까지 돌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장애인에게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의 원칙이 실천될 때까지 뛰겠다"며 "내가 들고 다니는 콩나물은 그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요즘 김 주교는 직원들이 일하러 나오는 9시 전 출근해 그들이 일을 마치는 오후 4시 이후에 퇴근한다. 김 주교는 19일에도 기자에게 작업장을 소개하다가 "중요한 점심 약속이 있다"며 급히 나섰다. 그는 "지역 후원회 사람들과 점심 약속이 있는데, 이런 자리는 빼먹으면 안 된다"며 '촌장'모자와 콩나물 한 봉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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