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고름 튀어도.. "소록도 43년, 하늘만큼 행복했다"
"우리, 특별한 거 아니니까 알릴 필요 없었어요."
은발의 '천사 할매'가 한국어로 말했다. 약간 어눌했지만 친숙한 발음이었다. 43년간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돌보다 2005년 돌연 모국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던 마리안느 스퇴거(82) 수녀다. 그는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을 맞아 다시 소록도를 찾았다. 26일 국립소록도병원 강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수녀는 그간 언론 인터뷰를 사양했던 이유에 대해 "그냥 남을 도와주기 위해서 왔고 소록도에서 진짜 좋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저 그들의 좋은 친구였고 특별히 (세상에) 알릴 일을 한 게 없다"고 말했다.
김연준 소록도성당 주임신부가 보탰다. "그동안 인터뷰하시자고 설득할 때마다 기사로 나가면 너무 (과장돼) 크게 보인다고 그러셨어요. 당신이 한 일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 게 싫다고요."
11년 만에 소록도에 돌아온 마리안느 수녀는 이날도 개인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달고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돌아와서 정말 기쁘다"며 "소록도가 그동안 많이 변했다.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는 중"이라고 입을 뗐다.
"환자들이 치료 끝나고 가족 품으로 돌아갈 때 가장 기뻤고, 손과 발을 다 수술하고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환자를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팠어요." 김 신부가 다시 보충 설명을 했다. "완치가 됐어도 가족들이 거부해 소록도에 남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상당수 한센인은 편견 때문에 가족들과 단절됐지요."
마리안느 수녀는 28세 때인 1962년 2월 24일 소록도에 왔다. 친구이자 동료인 마거릿 피사렛(81) 수녀는 3년 전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마리안느는 농부의 딸이었고, 마거릿 수녀는 의사의 딸이었다. 둘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간호학교에서부터 같은 방에 살았다. 어렸을 때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뒤 생명을 지키는 데 생을 바치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마거릿 수녀는 치매를 앓고 있어서 이번에 함께 오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 있는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35년째 이곳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서판임(56)씨는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의 엄마"라고 했다. 마스크와 장갑, 방역복으로 무장한 병원 직원들과 달리 흰 가운만 걸친 수녀들은 짓물러 달라붙은 환자의 손·발가락을 맨손으로 떼어 소독했다. 피고름이 얼굴에 튀어도 개의치 않았다. 환자들은 두 수녀를 이렇게 기억했다. "아침마다 병실을 돌면서 따뜻한 우유를 나눠줬다. 밥을 넘길 수 없는 환자들이 우유를 먹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웬만한 분들은 우리를 만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데 수녀님은 환자와 마주 보고 앉아서 자기 무릎에 환자 발을 올려놓고 냄새를 맡은 뒤 상처를 치료했다"….
애정만 베푼 것이 아니다. 두 수녀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후원을 받은 덕분에 소록도에 의약품을 보급하고 영아원과 결핵 병동을 지을 수 있었다. 결혼 후 섬 밖으로 나가는 이들에겐 정착금을 쥐여줬다. 김 신부는 "정작 자신들은 43년간 단 한 푼도 보수를 받지 않으셨다"고 했다.
두 수녀는 2005년 11월 22일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돌연 소록도를 떠났다. 행여나 직원들이 따라올까 봐 광주로 나와서 편지를 부쳤다고 한다. 마리안느 수녀는 "우리도 결심하기까지 정말 어려웠다"며 "마음이 무거웠지만 몸이 아파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여기서 죽고 싶었는데 대장암에 걸려 세 번 수술을 받게 돼 떠나야 했어요. 더 이상 일할 수 없는데 짐이 되긴 싫었지요. 그날 우리도 많이 울었습니다."
마리안느 수녀는 요즘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마트레이에 산다. "일주일에 세 번 20㎞ 떨어진 인스부르크에 가서 미사 드리고 아픈 마거릿 수녀를 보고 온다"고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빈곤층이 받는 최저 수준의 국가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지만 한국 측에서 제안한 노후 보장과 금전 지원은 극구 사양하고 있다.
소록도에서 행복하셨느냐고 물었다. "예. 하늘만큼, 이마~안큼 행복했습니다." 천사 할매가 양손을 크게 벌려 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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