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선장 되고 첫 항해서 침몰.. 법정에 선 후 '마도로스 출신 법대교수' 결심

권순완 기자 2016. 4.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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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논문 최다 인용.. 고려대 法大 김인현 교수

작년 8월 한국연구재단은 국내 학자들의 지난 10년간(2004~2013년) 논문 피인용 횟수를 집계해 발표했다. 학술지 논문이 다른 논문에 얼마나 많이 인용됐는지 보여주는 통계였다. 법학 분야의 2558명 학자 가운데 1등을 차지한 건 헌법이나 민법 교수가 아니었다. 해상법(海商法)을 전공한 고려대 김인현(57) 교수였다. 그의 논문 총 피인용 수는 330회에 달했다. 해상법은 물품의 해상 운송과 그 보험 관계 등을 규율하는 법이다.

보통 법학 논문 첫 페이지 각주엔 논문 저자가 '법학박사'로 소개된다. 김 교수 논문엔 '법학박사' 앞에 '선장'이라는 칭호가 붙어있다. 그는 원래 한국해양대를 나와 항해사를 거쳐 상선(商船) 선장으로 태평양을 누비던 마도로스였다. 30대 때 처음 법학의 길로 들어섰고 40세에 교수가 됐다. 지금은 학계에서 논문 많이 쓰는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 5일 오후 연구실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뱃사람 하면 떠오르는 외모는 아닌데요.

"어릴 때부터 그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둘짼데 형이 남자답게 생기고 운동도 잘했거든요. 저는 반대로 겁이 많고 책을 좋아했죠.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수영을 잘 못했습니다."

김 교수는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에서 태어났다. 일제 시대 일본에서 운수업을 하던 조부가 일본에 있던 재산을 처분한 돈으로 어선 한 척을 사서 축산항에 자리를 잡았다. 한때 50t급 어선을 3 척 소유한 부잣집 손자로 컸다고 했다. 그러나 가업이 기울면서 원했던 서울이나 대구로의 유학 꿈은 좌절돼 버렸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마지막으로 남은 어선 '대경호'가 축산항 방파제에 충돌해 좌초됐습니다. 물 위로 마스트(돛대)만 솟아올라 있던 게 기억나요. 보험도 들지 않아 인양 후 싼값에 팔아버렸습니다. 선주였던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남의 배 페인트칠을 하러 다니는 신세가 됐어요. 그렇게 제 유학의 꿈도 좌절됐습니다. 공부를 곧잘 해 서울로 가고 싶었거든요. 많이 울었습니다."

―가업을 다시 살리려고 해양대에 진학한 겁니까.

"재수를 할 때 한 친구가 '세계의 대학'이라는 책에 한국 대학은 서울대와 한국해양대밖에 없더라고 했습니다. 해양대 영문 표기에는 'Korea'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죠. 그래서 해양대에 갈 생각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물과 관련된 대학이라며 싫어했습니다."

그는 해양대를 졸업하고 일본의 산코(Sanko) 기선에 항해사로 입사했다. 산코는 당시 상선을 350척 운영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벌크선(비포장 화물 적재선) 선사였다. 1982년 초봉이 연 600만원이었다. 그곳에서 계속 일하다 1990년 12월 해양대 동기 중 최초로 선장이 됐다. 2만5000t급 '산코 하베스트(Sanko Harvest)'호였다. 결혼한 지 2개월 만의 일이었다.

첫 항해에서 좌초 뒤 좌절

―첫 항해에서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1991년 2월 14일이니 밸런타인데이였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탬파에서 인광석 3만t을 싣고 출발해 호주 남서부 에스페란스에 닿을 때쯤이었습니다. 새벽 2시쯤 자고 있는데 몸이 두 번 쿨렁쿨렁해서 일어났습니다. 배가 암초에 걸린 겁니다. 해도를 확인해 봤으나 암초 표시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2등 항해사가 호주 측에서 보낸 새 정보로 해도를 개정하지 않아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배 밑바닥이 뚫려 물이 들어찼어요. 해안으로부터 14마일 정도 거리라 예인선을 불렀습니다."

―배를 포기했군요.

"인명 피해가 없어 다행이었습니다."

―선장으로서 무슨 느낌이 들던가요.

"그 정도 사고에서 큰 배는 가라앉는 데 며칠 걸립니다. 퇴선한 지 이틀 후에 산코 관계자와 같이 중요 서류 등을 챙기러 침몰 직전의 배에 다시 올라탔습니다. 선장 방에서 항해 일정표를 챙기고 다시 작은 배로 옮겨 타려는데 발이 차마 안 떨어집디다. 사람들이 빨리 뛰어내리라고 고함치는데 불현듯 '선장이라면 배와 운명을 같이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서 있었어요. 뭍을 향해 가는데 뒤를 돌아보니 제 배가 다 가라앉아 마스트만 보이더군요. 어디선가 본 광경이었죠. 어선 좌초로 가계가 무너지고, 나는 상선을 바다에 버리고 도망가는 꼴이었죠. 자괴감이 솟구쳤습니다."

그길로 귀국해 몇 개월간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호주 법원에서 하베스트호 침몰과 관련한 소송 건으로 불렀다. 화주(貨主) 보험사가 선장의 직무능력을 문제 삼으며 산코에 배상을 요구한 것이었다. 법정에서 '배는 침몰했지만 나는 유능했다'고 주장해야 하는 형국이어서 너무 가기 싫었다고 했다. 산코에서는 "김 선장이 안 나가면 해양대 출신 선장들 위상이 떨어진다"고 설득했다.

―처음 법정에 서 본 것일 텐데요.

"복잡한 해상법 문제가 개입돼 있으니까 법률 자문이 많이 필요했어요. 주위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마땅히 잘 아는 분이 없더라고요. 회사 측 변호사도 외국인이었습니다. 대학교 때 배운 초보적인 해상법 지식으로 고생했습니다."

―법(法)과의 만남이었군요.

"산코 소송은 결국 합의로 끝났지만 선장 출신으로 해상법을 공부하면 실무와 이론을 다 갖출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같이 어려운 지경에 빠진 선장도 돕고요."

선장에서 법학도로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 만인 33세 때 법학대학원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도서관에 다니며 생소한 민법전이니 상법전을 들추어 봤다. 1년 뒤인 1993년 11월 고려대 법대 대학원에 합격했다. 그는 전화로 합격을 알리던 대학 직원의 목소리가 "신천지가 열리는 소리 같았다"고 말했다.

―5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지요.

"아침 8시에 학교에 나가 밤 11시에 나왔습니다. 9년 동안의 항해 경험을 법률 논리로 다시 한 번 소화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교수님들도 실제 배를 몰던 학생이 법학을 공부한다니까 기특해하셨고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자꾸 하베스트호 사고가 머리에 맴돌았어요. 이참에 일단락을 짓자는 마음으로 '월간 해양한국'에 '본선 선장의 선박전손사고에 따른 국제소송 체험기'를 2회 연재했습니다. 소송의 개요와 심리 과정에 대한 리뷰였는데, 그걸로 나 자신에게 좀 더 당당해질 수 있었습니다."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도 근무하셨다고요.

"해상 실무를 아는 법률 전문가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제 이력에 흥미가 갔나 봐요. 시범 과제가 1995년 남해에 좌초된 시프린스호 사고를 정리해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고문을 올리니까 김앤장을 통해 받은 보험회사 쪽에서 '짠물 냄새가 난다'며 호평했나봐요. 그걸로 실장 직을 제의받았습니다. 싫다고 했죠."

―왜요.

"제가 왜 실장입니까, 선장이지. 선장 타이틀과 선장 수준의 연봉을 요구했어요." 그는 로펌에서 4년 일하다가 목포해양대 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고려대로 자리를 옮겼다.

―논문이 많이 인용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해상법은 최근 발전하는 법 분야입니다. 국내법 제·개정도 잦고 국제조약도 자주 체결돼 새로운 논문 거리가 무궁무진하죠. 부지런하기만 하면 학자들이 인용할 만한 선행 논문을 쓸 수 있습니다. 이번 한국연구재단 집계에서 제 논문 중 제일 많이(21회) 인용된 것도 2007년 개정된 상법 규정에 대한 연구였어요. 매년 대법원의 주요 해상법 판례를 정리해 논문으로 내는데 이런 논문도 많이 인용됩니다."

―현안을 좇아 논문을 쓰면 연구의 질이 떨어지진 않을까요.

"다작(多作)이냐 대작(大作)이냐의 문제인데 저는 대작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다작을 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학자는 자기 생각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교수 정년이 돼도 학문적 완성은 어렵기 때문에 막연히 그것만 기다릴 수는 없죠."

―법학자로서의 꿈이 뭔가요.

"우리나라에 해사전문법원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한국이 해상 강국이라고 하지만 관련 법제로 보면 아직 갈 길이 멀어요. 해운표준계약서가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앞바다에서 일어난 사고도 영국에 가서 재판을 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선장으로서의 꿈도 남아있습니까.

그는 잠시 먼 곳을 응시하더니 말을 이었다. "정년 마치면 다시 배를 탈까 해요. 바다에 나가면요, 갈매기가 수면에 꽂히듯이 달려듭니다. 붉은 석양도 참 아름답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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