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명인열전]몽당연필 쓰기 30여년.."이웃 돕는 '키다리 아저씨' 되고 싶어"

2016. 3. 28.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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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최상준 남화토건 대표
[동아일보]
24일 최상준 남화토건 대표이사를 만난 집무실은 10여 ㎡ 넓이로 좁았지만 책들로 빼꼭했다. 그는 30년이 넘은 집무실 탁자·의자와 전화기를 쓸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살지만 평생 100억원이 넘는 기부를 실천한 최고경영자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24일 광주 동구 금남로 남화회관 빌딩 7층. 최상준 남화토건 대표이사(78)의 집무실은 생각보다 좁았다. 면적이 10여 m²에 불과해 국내 도급 순위 100위권에 드는 중견 건설업체의 대표 집무실이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비좁은 공간이지만 책이 빽빽이 꽂혀 있고 한쪽에는 도자기 소품, 열쇠고리 등 기념품이 가득 진열돼 있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에게서 동심이 느껴졌다.

그는 ‘몽당연필을 쓰는 사업가’로 유명하다. 30여 년 동안을 현장에서, 집무실에서 몽당연필로 메모를 하고 결재를 했다. ‘아직도 몽당연필을 쓰느냐’고 묻자 그는 ‘이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기거했던 ‘이화장’ 얘기를 꺼냈다.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가 쓰던 몽당연필이 전시돼 있어요. ‘검소하게 살자’는 마음가짐을 보여 주는 짧은 연필을 보고 감동을 받았죠.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그의 검소함은 집무실 곳곳에서 느껴졌다. 탁자와 의자는 1984년 남화회관을 신축하면서 샀다. 34년 된 의자는 세련되지 않았지만 편안한 느낌을 줬다. 그는 “의자 천을 한 번 바꿨는데 아직도 쓸 만하다”고 했다. 집무실 전화도 30년이나 됐다고 한다.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사는 최 대표는 평생 나눔을 실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에게 나눔의 의미를 묻자 “필요한 것 이외에 소유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이라며 “기부는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했다.

광주 북구 매곡동 광주공고 인근에 있는 석봉도서관 터에서는 이달 1일부터 시작된 증축공사가 한창이다. 2014년 석봉도서관을 지어 사회에 환원한 최상준 대표이사는 ‘좌석이 부족하다’는 말을 전해듣고 5억5000만원을 추가로 기부해 6월 말까지 4층 공간 505㎡를 완공할 계획이다.
그의 나눔 정신을 상징하는 것은 광주 북구 매곡동의 석봉도서관이다. 석봉(碩峰)은 그의 호다. 석봉도서관은 2014년 완공됐으나 이달부터 증축 공사를 벌이고 있다. 도서관 공사를 재개한 이유는 뭘까?

광주 북구 매곡·삼각·오치동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문화 갈증을 느껴 왔다. 행정기관에 도서관 건립을 요청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지연됐다. 주민들의 도서관 건립 의지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낀 그는 26억 원을 내놨다. 2014년 4월 지상 3층(연면적 1775m²) 규모의 석봉도서관을 완공한 뒤 광주시교육청에 기부했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 8000여 권과 시가 2억 원에 달하는 미술품 80여 점, 각국 공예품 300여 점도 함께 기부했다.

석봉도서관이 완공된 지 1년 정도 지나자 학생들로 붐볐다. 좌석이 부족해 아침부터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그는 도서관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5억5000만 원을 추가로 기부해 4층(505m²)짜리로 증축하기로 했다. 6월 증축 공사가 끝나면 학생들이 자리가 부족해 발길을 돌리는 일은 없어질 것이라며 좋아했다.

“도서관 건립은 평생의 꿈이었어요. 도서관은 책만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심어 주는 지식 창고입니다.” 최 대표가 도서관 건립을 갈망했던 이유다. ‘인재 육성이 가장 큰 투자이며 독서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이라는 그의 생각은 도서관으로 실현됐다.

그는 52년 동안 샐러리맨으로 일하며 성공 신화를 썼다. 고향인 전남 화순군 오성초교와 화순중, 광주공고를 졸업한 뒤 전남대 건축공학과를 나와 1964년 남화토건㈜에 입사했다. 남화토건은 그의 형인 유당 최상옥 회장(89)이 광복 직후 설립한 건설회사다. 29년간 건설현장을 누비며 대리, 과장, 부장, 상무, 전무,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1993년 남화토건 대표이사에 오른 이후 23년째 경영을 맡고 있다. 그가 대표가 된 것은 단지 창업주 동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최상옥 회장은 “남화토건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동생 최상준’이 아니라 ‘직원 최상준’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성실했다.

그는 최고경영자(CEO)로서도 빈틈이 없었다. 회사 법인카드를 갖고 있지만 업무 때만 사용하고 지인들을 만날 때는 개인 신용카드를 쓴다. 톨게이트 요금조차 52년간 회사 업무와 개인 일을 구분해 계산할 정도로 공(公)과 사(私)를 철저히 구분한다.

그는 대표이사 취임 4년 만에 외환위기를 맞았지만 한 명의 직원도 구조조정하거나 정리해고를 하지 않았다. 시대 흐름에 역행한 남화토건은 당시 자금 사정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직원들 가운데 40% 정도를 내보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지만 함께 고난을 헤쳐 가기로 했다. 구조조정 대신 노동부의 지원을 받아 직원들을 6∼9개월간 교육하며 고비를 넘겼다. 남화토건은 현재 환경, 소음, 진동 등과 관련된 건설 신기술 40여 건을 보유한 저력 있는 회사로 발전했다.

그는 ‘나눔’이라는 씨앗을 민들레 홀씨처럼 뿌리고 다닌다. 1997년 한 직원이 백혈병으로 병상에 누웠을 때 헌혈증서 20장을 가장 먼저 건넸다. 60세 나이에 직원을 위해 처음으로 헌혈을 한 뒤 예찬론자가 돼 6년간 총 98회 ‘생명나눔’을 실천했다. 헌혈을 더 하고 싶었지만 만 65세까지만 헌혈이 가능해 100회를 채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그런 아쉬움을 대한적십자사 봉사활동으로 달래고 있다. 직원들과 진정으로 화합하기 위해 노사분규 없는 회사, 전 직원이 금연하는 직장을 만들었다.

1980년대 초반 나눔을 시작한 이후 학교, 불우이웃, 시민단체, 종교단체 등 지역사회 곳곳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평생 얼마나 나눔을 실천했는지 모르고 있다. 조영환 남화토건 전무이사는 “최 대표가 그동안 120억 원 정도를 각계에 기부했을 것”이라고 귀띔을 했다.

그는 70세 때 현대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늦깎이 수필가로 등단했다. 신인상 수상작인 수필집 ‘손이 두 개 달린 뜻’에 실린 문구는 평생을 실천한 나눔과 배려 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다.

“왜 우리 몸에 손이 두 개 달려 있는지 알 것 같다. 여태까지 살면서 양손으로 부지런히 움직여서 나의 의식주를 해결하려고 무척이나 힘써 왔다. 그런데 조물주는 우리들의 손을 자기만을 위해서 쓰라고 두 개나 달아놓지 않았을 것 같다. 오른손은 자기를 위해 달아 주셨고 왼손은 남을 위해 쓰라고 준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키가 160cm로 단신인 그가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이유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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