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원 야쿠르트'의 기적.. 할머니들에게 딸이 생겼다

심희정 기자 2016. 3. 1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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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 아줌마의 '홀몸노인 돌봄 활동' 동행 취재
‘군자동 야쿠르트 아줌마’ 한기옥씨(오른쪽)와 이명순 할머니가 마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한국야쿠르트 제공

“짤랑 짤랑.” 야쿠르트 아줌마 한기옥(52·여)씨 주머니에는 언제나 열쇠 5개가 들어 있다. 서울 광진구 군자동에서 그가 야쿠르트를 배달하는 집 가운데 5곳의 현관문이 이 열쇠로 열린다. 주민들이 그에게 거리낌 없이 맡긴 현관열쇠다.

1997년 입사한 한씨는 20년째 군자동을 돌고 있다. 매일 170여 가구에 야쿠르트를 배달한다. 이 중 노인이 홀로 사는 24가구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한국야쿠르트는 1994년부터 서울 광진구를 시작으로 지방자치단체와 손잡고 독거노인 돌봄 활동을 하고 있다.

한씨는 10월이면 ‘20년 근속상’을 받아 5박6일 동남아 여행을 간다. 그런데 마냥 즐겁지는 않다고 했다. “쉬는 날에는 어르신들이 어떻게 지내시나 확인할 수 없어 걱정”이라는 그를 따라 지난 8일 군자동을 돌아봤다.

‘170원’의 마법

오전 8시30분, 화양시장에서 배달이 시작된다. 한씨의 걸음걸이는 웬만큼 빠르게 걸어도 따라잡기 어려웠다. 뛰다시피 해야 겨우 쫓아갈 수 있다.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왜 그리 급하세요?” “오전에는 복지관에 가느라 집을 비우는 어르신이 많아요. 잠깐이라고 얼굴을 뵈려면 서둘러야 해요.” 독거노인들은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광진 노인종합복지관 앞에 아침 일찍부터 가서 기다린다고 한다. 이들에게 배달되는 건 1병에 170원 하는 야쿠르트 2병이다. 1병 용량이 65㎖에 불과한 야쿠르트가 노인들과 한씨를 이어준다.

불이 환하게 켜진 집에서 이상덕(74) 할머니가 반갑게 한씨를 맞았다. “원래 불을 잘 안 켜두는데 아줌마 올 시간이라 켜뒀어. 매일 와서 같이 말동무를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이 할머니는 연신 한씨를 쓰다듬었다.

빈집 현관에 걸린 주머니에 야쿠르트 등을 넣으면서 2분 정도 걸었다. “나 왔어요”라는 소리에 박야무(74) 할머니는 머리를 감다가 물기도 채 닦지 않고 현관으로 나왔다. “좀 갖고 오려 했는데 안에 쓰레기가 있어서 못 가져왔어요.” 골목에서 종이상자 몇 개를 봐둔 한씨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와준 것만도 고마워.” 박 할머니는 가끔 파지를 주워 용돈벌이를 한다. 그는 “10년이 넘었다. 이제는 딸 같고 동생 같다”고 했다.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찬바람이 부는데도 한씨 이마엔 땀이 맺혔다. 독거노인뿐 아니라 일반 고객에게도 배달해야 해 항상 몸도 마음도 바쁘다. 그래도 꼭 짬을 내서 들르는 곳이 있다. 시간 맞춰 한씨에게 줄 커피 물을 끓이는 김우순(85) 할머니 집이다. 김 할머니는 한씨가 도착하자마자 방에 들였다. 어김없이 냄비에 물이 끓고 있었다.

익숙하게 방으로 들어선 한씨는 차가워진 방바닥을 짚고선 “전기장판 안 켜고 주무셨네”라고 잔소리를 했다. 김 할머니는 “날이 따뜻해 괜찮다”며 불편한 다리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달 시작 2시간여 만에 한씨는 자리에 앉았다. 10분간 짧은 수다는 한씨에게도 김 할머니에게도 즐거워 보였다. 밥은 잘 챙겨 먹는지, 도시락 배달은 꼬박꼬박 오는지, 1주일에 한 번 오는 목욕차는 잘 이용하고 있는지, 궁금한 게 많았다. “내일 또 올게요.” 한씨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 할머니 얼굴에 아쉬움이 번졌다.

바쁘게 울리는 휴대전화

배달하는 동안에 한씨의 휴대전화는 쉼 없이 울렸다. 주로 ‘어디쯤 왔냐’는 전화였다. 오전 11시쯤 전화 한 통을 받더니 한씨가 속도를 높였다. 골목을 꺾어 들어가자 파란 대문 앞에 서 있던 현순(77) 할머니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이게 무슨 말이야?” 현 할머니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문자가 왔는데 눈이 침침해 읽을 수가 없다고 했다. “휴대전화 요금 고지서 문자네요.” 한씨는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 “글 배운다고 중학교에 다니는데도 눈이 침침해 보이지가 않아.” 현 할머니가 멋쩍게 웃었다.

한씨 덕에 야쿠르트를 배달받기 시작한 독거노인도 있다. 이명순(85) 할머니는 혼자 살지만 슬하에 자식이 있어 이런 혜택은 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1년 전 이 할머니가 혼자 지내는 걸 알게 된 한씨는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대상이지만 저소득 독거노인도 야쿠르트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어렸을 땐 살기 어려워 야쿠르트 같은 건 사먹을 생각도 못했다”며 “좋은 것 먹고 지내니 힘이 난다”며 웃었다.

야쿠르트 아줌마 덕에 독거노인이 구조되는 일도 꽤 있다. 지난해 10월 서울 양천구에서 야쿠르트 배달을 하는 양미숙(48·여)씨는 평소처럼 집 앞에서 유순례(78) 할머니를 불렀다. 문틈으로 신음소리가 들려 집 안에 들어가 보니 탈진한 할머니가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다. 양씨는 곧바로 119에 신고했다. 입원치료를 받고 유 할머니는 건강을 되찾았다.

한씨는 할머니들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나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많아 책임감이 크다. 야쿠르트 아줌마를 환갑까지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야쿠르트 아줌마의 둥근 모자 밑으로 땀방울이 또르르 굴렀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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