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도 쓰나미도 이겨낸 할머니들의 육성 들어보세요

박정호 2016. 2. 2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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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일본에 사는 한국여성 추적 40년 가와타 후미코
가와타 후미코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대표가 사진으로만 남은 아시아 각국 위안부 할머니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지난해 위암 수술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상태다. “속눈썹도 빠져 설거지 할 때 물이 직접 눈으로 튀곤 한다. 눈썹의 고마움을 알게 됐다”고 했다. [사진 박정호 기자]
가와타 대표가 배봉기 할머니를 인터뷰한 녹음 테이프 70여 개를 꺼내 보이고 있다. 왼쪽은 그의 신간을 공동 번역한 김해경 재일 저널리스트.

“하이, 야리마스네(はい, やりますね).”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우리말로 “그럼요, 해야죠”라는 뜻이다. “벌써 40년째 됐는데, 예전으로 되돌아가도 이 일을 다시 하겠느냐”고 기자가 물은 직후였다. 대답은 명료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73)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대표다.

가와타 대표는 1977년 12월 5일을 잊을 수 없다. 일본 오키나와에 홀로 버려진 배봉기(1914~91) 할머니를 처음 만난 날이다. 배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최초로 증언했었다. 그날이 운명의 날이 됐다.

이후 그는 일본에 사는 한국(조선)인 여성의 고단한 삶을 추적하는 데 40년을 바쳤다. 3·1절 97주년을 앞두고 번역 출간된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2014)는 그런 노력의 결정판이다. 배 할머니의 역경을 전한 『빨간 기와집』(1987)의 확장판이다.

위안부를 포함한 재일 한국인 1세 여성의 지난 한 세기, 특히 식민지 시대를 버텨낸 우리 할머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되살려 냈다.

지난 22일 도쿄의 한적한 주택가에서 가와타 대표를 만났다. 서울보다 봄이 빨리 오는 도쿄. 집 앞 텃밭의 동백이, 이웃집 담장의 매화가 수줍은 듯 꽃망울을 터뜨렸다. “우리 할머니들도 저렇게 붉고 고운 시절이 있었겠지” 하는 사념에 잠시 빠졌다. 집 안에 들어서니 피아노 위에 놓인 아이들 사진이 보인다.

- 아이들은 언제나 사랑스럽죠.

“손녀들입니다. 초등 1학년과 네 살이 됐네요. 제가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우리 자손들을 위해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제 제가 그 말을 할 나이가 됐어요. 옛 어른들의 마음을 알겠어요. 지금 일본 정세는 너무 좋지 않거든요. 아베 총리는 너무 보수적이죠. 전쟁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아요. 아베 정권의 평화는 전쟁과 같은 뜻으로 보입니다.”

- 전쟁의 폐해를 고발해 왔습니다.

“배봉기 할머니를 만나러 오키나와에 자주 갔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곳이죠. 일본군 위안부의 넋도 떠돌고 있고요. 배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그곳 어디에서나 망자들을 기억하는 향 냄새가 진하게 풍겼어요. 전쟁이 끝난 지 32년이 지났는데 말이죠. 전쟁 직후 불타고 남은 재 냄새와 비슷했어요. 도쿄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던 것이죠. 그런 전쟁의 냄새를 어떻게든 도쿄에 가지고 오려 했습니다.”

- 일본인으로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일 한국인이 맡아야 할 주제라고 믿었죠.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일본인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작업이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재일 한국인 여성의 힘겨웠던 삶은 일본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죠. 두 번 다시 전쟁이 있어선 안 될 겁니다.”

-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계기라면요.

“제 선친도 태평양전쟁 때 뉴기니에 참전했었습니다. 당시 일본군 3만 명이 뉴기니에 갔는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3000명에 불과했습니다. 구타·폭언 등 상사에게 학대받았던 아버지의 전쟁 체험담을 어릴 적부터 매일 듣고 자랐어요. 나라 없는 설움에 가난과 차별이란 겹겹의 고통을 겪었던 한국인 여성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었겠죠. 제 손녀들이 또다시 가해자의 국민으로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웃 나라와 대등한 관계에서 만나게 하고 싶습니다.”

- 일본인 할머니들 취재로 시작했었죠.

“대학을 졸업하고 여성잡지 기자 생활을 했어요. 그때부터 나이 든 여성의 얘기를 들어 왔습니다. 농사 짓고, 옷을 만들고, 나와 비슷한 계층의 여성들에게 끌렸습니다. 특히 할머니들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지혜의 세계를 보여주었죠. 메이지 시대 태어난 여성에 대한 책도 여러 권 냈습니다.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배봉기 할머니를 알게 됐어요. 여자로 태어나면서 짊어진 모순, 그 모순이 집약된 게 빈곤과 성매매라는 사실에도 눈을 뜨게 됐고요.”

 신간 『몇 번을 지더라도…』에는 모두 29명의 재일 한국인 할머니들이 소개된다. 가와타 대표가 일일이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다. 각기 고향·출신·나이는 달라도 ‘지배국’ 일본에 뿌리를 내리려 했던 우리 어머니들의 땀과 눈물이 가슴을 후빈다. 못 배우고, 못 먹고, 남편에게 구박받고, 갖은 놀림을 당하면서도 돼지를 키우고, 막걸리를 팔고, 공장에 다니고, 고철을 모으며 꿋꿋하게 일어선 이들의 얘기다.

가와타 대표는 “평소 자녀들에게도 꺼내지 못한 사연이 많아요. 식은땀을 흘리며 들었습니다. 할머니 한 분 한 분의 몸에 새겨진 방대한 기억이 바로 역사”라고 했다.

- 한국인이 더욱 알아야 할 일입니다.

“30여 년 전 배봉기 할머니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신례원을 찾아간 적이 있어요. 할머니 친척을 어렵게 수소문했는데, 사람들은 할머니가 성공해서 가족을 찾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더군요. 한국과 일본의 경제 격차가 커서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크게 달라졌잖아요. 한국 독자들도 재일동포의 힘겨웠던 나날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지금도 일본에는 취업·결혼 등의 차별이 남아 있지만 말이죠. 재특회(在特會) 같은 극우단체도 있고요.”

 - 자료조사도 꼼꼼하게 병행했는데요.

 “기록을 살펴보면 한국인이기에 더 극심한 피해를 본 경우가 많습니다. 일례로 1945년 3월 도쿄대공습 때 조선인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었는데, 그 사망 비율이 일본인보다 매우 높았습니다. 일본에 연행된 조선인이 주로 공습이 집중된 군수공장에서 일했기 때문이죠. 또 일본 전사자에게 유족연금이 지급됐지만 외국 국적 전사자에겐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수탈에 따른 영양 빈곤으로 조선인 한센병 환자 비율도 일본인보다 10배 정도 높은 편입니다.”

 - 그럼에도 할머니들은 버텼습니다.

 “대단하죠. 죽지 못해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쟁도, 쓰나미도 그들의 삶을 앗아가지는 못했습니다. 때론 신세타령처럼 서글퍼했지만 절대 한탄과 절망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벼랑 끝에서 만들어낸 유머라고 할까요. 가난도 고생도 자랑처럼 훌훌 털어버리는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 에너지는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저도 그 힘을 받아 투병생활을 견뎌 내고 있습니다.”

 - 몸 어디가 좋지 않으신데요.

 “2년 전 위암에 걸렸습니다. 항암치료를 먼저 한 다음 지난해 10월 위 전체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어요.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렸을 때 1945년 원폭 피해자들의 두려움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당시 살아 남았던 박남주 할머니는 ‘최악이 되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어떻게든 살려는 생각이 들지’라고 했죠. 이제 제게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필생의 작업이 된 일본군의 성폭력 문제를 계속 파고들 작정입니다.”

 - 일본은 강제동원 기록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지난해 투병 중에도 오키나와에 다섯 번 다녀왔습니다. 아직도 확인할 게 많아요. 취재 내용을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3회 연재했습니다. 97년에 인도네시아 위안부에 대한 책도 냈고요. 위안부 동원은 분명 일본형법 226조에 명기된 강제적 폭력납치와 동일한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지난해 말 한국과 일본 정부가 합의한 위안부 문제 해법은 매우 아쉽습니다. 피해 당사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도쿄에서>

[S BOX] ‘위안부 재판’에 지고도 덩실덩실 춤 춘 송신도 할머니

왼쪽에 사진이 하나 있다. 할머니 한 분이 한복을 입고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1998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을 방문했던 송신도(94) 할머니다.

송 할머니는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유일한 조선인 출신의 위안부다. 93년부터 10년 동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벌였으나 재판에선 결국 지고 말았다. 그의 얘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감독 안해룡)도 2009년 개봉했다.

가와타 대표는 재일 한국인 여성 가운데 송 할머니를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꼽았다. “최고는 역시 송신도”라고 치켜세웠다. “그만큼 쾌활한 이는 보지 못했어요. 겉은 강해 보이지만 속에는 슬픔이 가득한 분”이라고 했다.

이번 책의 한국어판 제목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바다출판사)도 송 할머니의 노래에서 따왔다.

2000년 도쿄고등법원이 배상권 청구 항소를 기각할 당시 모두가 침울해하자 할머니는 마이크를 잡고 한 곡조 뽑기 시작했다. 집회 참석자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때 즉흥가의 한 토막. ‘여기 모인 분들 잘 들어요. 두 번 다시 전쟁은 하지 말아주세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집을 잃은 송 할머니는 현재 도쿄에서 생활하고 있다. 가와타 대표는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을 분이 오히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죠. 올해에도 만났습니다. 예전엔 위안부 얘기를 많이 했지만 요즘에는 살아가는 얘기를 주로 합니다. 쓰나미도 겪었고, 지진도 있었지만 지금은 행복하다고 하세요.”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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