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바라고 전역 미룬게 아닌데.. 이젠 기업 지킬 것"

곽래건 기자 2016. 2. 2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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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北 도발 때 애국심 보여준 병사들.. 기업 특채 그 후

김동희(25)씨는 작년 8월 경기도 양주 육군 제5기갑여단에서 장갑차 조종수로 복무하고 있었다. 전역일(9월 22일)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김씨의 머릿속은 제대 후 일자리를 구할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남동생과 단둘이 살아온 그는 동생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가장(家長)이었다. 그러나 8월 20일, 북한군이 자신의 부대와 인접한 경기도 연천에 포격 도발을 했다는 소식에 그는 잠시 망설임도 없이 전역 연기를 신청했다.

그로부터 반년이 흐른 지금 김씨는 호텔리어로 변신했다. 지난 18일 김씨는 서울 광진구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청소가 끝난 객실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손에는 침구류 등 33가지 객실 점검 항목이 빼곡히 적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는 북의 목함지뢰 도발에 이은 포격 도발 당시 전역 연기를 신청한 장병을 특별 채용한 SK 계열 호텔에 지난해 11월 입사했다.

북의 도발이 터지자 김씨처럼 전역을 연기한 장병이 줄을 이으면서 신세대들의 안보관을 미덥지 않게 보던 우리 사회의 시선을 바꿔놓았다. 무려 장병 87명이 전역을 미루고 전선을 지켰고, 기업들은 이들을 특채하겠다고 나섰다.

이제는 새내기 직장인으로 변신한 이들 가운데 고졸(高卒) 학력으로 대기업에 당당히 입사한 김동희, 박이삭, 장우민씨를 본지가 만났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나라가 위급할 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지기 싫었고 직장에서도 똑같은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희씨는 부모가 이혼한 후 고등학교 때부터 동생과 단둘이 살았다. 김씨는 고교 졸업 후 공장 생산직에 여러 차례 원서를 냈지만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오전 10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피자 배달, 편의점, PC방 아르바이트 등을 하다 입대했다고 했다. 김씨는 북의 포격 도발 당일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김씨는 "전역일이 다가오면서 사회에 나가 어떻게 먹고살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많았다"며 "그러다 나라가 위급해진 상황에서 동생에게 부끄러운 형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전역 연기를 신청했다"고 했다. 객실 관리팀에 배치된 그는 입사 이후 매일 아침 영어 학원에 들렀다가 출근하고 있다.

박이삭(24)씨도 전역 연기를 신청했다가 SK하이닉스에 특채됐다. 그는 작년 북의 도발 당일 제대 말년 휴가를 마치고 강원도 철원 부대(육군 3사단)로 복귀하던 참이었다. 전역을 닷새 앞둔 시점이었다. GOP(일반전초) 근무에 투입돼 망원경으로 휴전선 철책 너머 북한군 GP(감시초소)를 보니 병력이 몇 배가 늘어 있었고, 평소에 보이지 않던 군용차들이 돌아다녔다. 그길로 전역 연기를 신청한 박씨는 결국 원래 전역일보다 하루 늦게 제대했다. 박씨는 "머릿속에서 '내일이면 전역인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후임병과 상관들을 생각하니 혼자서 먼저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박씨와 함께 근무하는 장우민(22)씨는 지난해 백령도 주둔 해병대에서 전역을 연기한 유일한 장병이다. 전역(8월 24일) 며칠 전 부대 상황실엔 '북한 잠수함이 레이더에 잡히질 않는다'며 비상이 걸렸다. 부대 상관들은 "넌 전역이 얼마 안 남았으니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장씨도 가족이 눈에 밟혔다고 한다. 장씨는 전역 예정일 당일 신고식을 마치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하지만 그는 전역 연기를 신청했고 남북 협상이 타결되면서 나흘 더 부대에 남았다가 제대했다. 장씨는 "동고동락한 해병대 전우들을 두고 혼자 집에 가면 해병으로서 당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박씨와 장씨는 현재 경기도 이천 공장 안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두 사람은 근무를 마친 뒤엔 기숙사 안에 마련된 독서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대학에서 공학(工學)을 전공한 다른 동료를 따라가기 위해서다. 박씨와 장씨는 "뭔가 바라고 전역 연기를 했던 게 아니고 군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는데 대통령께서 직접 격려해줘 잘한 일이구나 생각했다"며 "나중엔 사내 학점은행제 등을 통해 대학 과정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SK그룹 관계자는 "지난해 전역 연기자 87명 가운데, 현재까지 27명이 입사했다"며 "대학 복학 등의 이유로 나중에 입사 원서를 낼 전역 연기자도 전원 채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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