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이 역사" 판사도 꼼짝 못한 '기록왕' 임대규씨

2016. 2. 21.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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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부터 '달력 일기' 작성..신문스크랩·사진·영상까지 방대하게 기록 국가기록원 '한국시민기록문화상' 수상.."볼펜 쥘 힘 있을 때까지 기록할 것"

1979년부터 '달력 일기' 작성…신문스크랩·사진·영상까지 방대하게 기록

국가기록원 '한국시민기록문화상' 수상…"볼펜 쥘 힘 있을 때까지 기록할 것"

(충주=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르면 다 역사가 돼유. 그래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기록하는 거쥬."

충북 충주시 살미면 임대규(82) 씨의 집에 들어서면 마루에 걸린 큰 달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달력 전체에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다. 날짜마다 칸칸이 그날 일어난 집안일과 세상사가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의 보물 1호인 '달력 일기'다.

'밤 11시 53분 개성공단 단전 조치. 5만 명이 생계도 곤란할 것임. 공장 모두 몰수라고 북한에서 방송'(2월 6일), '설날. 온 집안이 북적였음. 경찰관 셋째 아들 근무로 불참. 다섯째 며느리 감기로 못옴'(2월 8일)

그의 달력일기에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는 최근 남북 관계도 고스란히 담겼다.

'세계 최강 F-22 전투기 4대. 2대는 당분간 주둔. 오산기지에서 F-22 배경으로 한미 공조 성명 발표. 오산에서 뜨면 6분 만에 평양 주석궁 도착.'(2월 17일)

국제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시간 오전 4시 타이완 6.4 강진. 17층 아파트 힘없이 무너져. 400여 명 사상'(2월 6일)

임 씨의 기록은 메모뿐이 아니다.

사진과 영상으로도 기록하고, 신문 스크랩과 각종 영수증, 청첩장, 복권, 우표, 버스 승차권, 극장 입장권 등까지 자료가 될 만한 것이면 모조리 보관한다.

지난해 1월 자료에는 4명이 숨지고 120여 명이 다친 의정부 오피스텔 화재를 다룬 뉴스 화면을 촬영한 사진도 있다.

왜 찍었냐고 묻자 "찍고 싶은데 갈 수가 없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산불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불에 태울 고춧대를 '150-7번지 밭'에서 '151-1번지'로 옮겨놨다는 메모에서는 입이 벌어진다.

집착에 가깝다 싶은 이런 세심한 기록은 예상치 못한 큰 힘을 발휘했다.

마을의 배추를 밭떼기로 계약한 중간상인들이 멀쩡한 배추를 다 뽑아놓고는 가격이 폭락하자 "벌레가 먹었으니 못 사겠다"며 괜한 트집을 잡은 적이 있었다.

판로가 막막해진 이웃 2명이 소송을 냈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패소 위기에 몰렸다.

재판 막바지에 판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 있느냐"고 묻자, 이웃들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임 씨의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배추 작업 당일 현장에 갔던 임 씨는 "작업까지 마쳐놓고 괜한 트집을 잡았다"고 적어둔 달력을 법정으로 들고 갔다.

판사는 "이 기록이 어떻게 틀릴 수가 있겠느냐"며 이웃들의 손을 들어주고는 "이런 것까지 적어 놓다니 이상한 양반 다 보겠다"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임 씨 자신도 배추 대금을 떼어먹은 김치공장 2곳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1천900만 원을 받아낸 일도 있다. 역시 '기록의 힘' 덕분이었다.

그가 기록을 시작한 건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할 일을 까먹지 않으려고 영농일기를 적기 시작했다가 메모 내용과 기록 형태가 갈수록 넓어졌다.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은 방 2개와 마루를 꽉 채우고도 모자랄 정도로 달력 일기와 각종 자료가 넘쳐난다. 정확한 분량이 얼마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가 아끼는 보물 중에는 온갖 자료를 뒤져 손글씨로 직접 만든 '영농법' 책자도 있다. 꽤 두툼한 노트에는 비료의 종류와 성질, 살포법부터 논밭 일구는 법까지 영농기술이 그림과 함께 자세히 담겼다.

그는 수십 년 전 처음 사진을 찍던 시절도 또렷이 기억한다.

충주 시내 사진관에 가서 도민증(지금의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당시로선 큰돈인 1천 원에 하루씩 필름카메라를 빌려쓰곤 했다.

지금은 재작년에 120만 원을 주고 산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한다.

농사일을 마치고 책과 신문을 보며 자료 정리를 하다 보면 새벽 1시를 훌쩍 넘기는 게 보통이다.

그가 2000년 한국국가기록원 주관 제1회 한국 시민기록문화상을 받은 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시 승격 60주년 기념 '충주 변천사 사진전'을 추진 중인 충주시도 임 씨의 자료가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협조 요청을 해왔다.

힘에 부칠 거 같지만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니 팔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다.

그는 볼펜 쥘 마지막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기록을 계속할 생각이다. 기회가 되면 전시회를 열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임 씨는 "기록을 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남한테 가르쳐 줄 수도 있다"며 "신문과 책을 보면 좋은 말이 참 많이 나오는데 머리에 담아두면 모두 좋은 공부가 된다"고 말했다.

k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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