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고맙소" 말에 무료 이발 멈출수 없었다
"우와! 우리 어머니, 엄청 예뻐지셨네."
4일 오후 7시 강원도 홍천의 한 노인 요양원. 의자에 앉은 백발 할머니의 등 뒤를 왔다 갔다 하며 머리를 매만지던 조남진(69)씨가 너스레를 떨자 주위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할머니는 "남 부끄럽게 그런 소리를 해" 하면서 손을 가로저었다. 조씨가 실눈을 뜨고 할머니 머리를 다시 살피고선 가위질을 몇 번 더 하더니 "이발 끝!"을 외쳤다. "고마워서 어떡해." 할머니가 함빡 웃으며 일어섰다.
조씨는 이 요양원의 '전속 이발사'다. 그렇지만 돈은 받지 않고 봉사하는 전속 이발사다. 조씨는 홍천 옆 춘천시 후평동 한 주택가에서 40년째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다. 평소 오후 7시면 자기 이발소를 지키고 있을 시간이지만 4일은 일찌감치 문을 닫고 요양원에 왔다. 조씨는 지난달 26일 요양원에 들러 노인 90여 명의 머리를 깎았다. 오전 7시부터 시작한 작업이 오후 5시가 넘어서도 끝나지 않자, 이날 재차 이발 가위를 들고 요양원에 온 것이다.
조씨가 요양원에서 이발 봉사를 시작한 것은 1997년 1월이다. 그때도 설날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이 요양원에서 일하던 먼 친척이 "명절이 다가오는데 노인들 머리가 모두 장발이라 걱정"이라며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됐다.
처음 노인들 머리를 깎으러 갔을 때 머리가 헝클어진 백발노인 20여 명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곤 깜짝 놀랐다고 한다. 10명쯤 이발하자 손가락이 저려 왔다. 속으로 '괜히 사서 고생하는구나' 후회할 무렵, 70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고맙소."
조씨는 "태어나서 '선생님' 소리는 그때 처음 들었다"며 "어쩐지 가슴이 뿌듯해졌고 그때부터 매달 요양원에서 노인들 머리를 깎게 됐다"고 했다.
조씨가 이발 봉사를 해온 20년 새 요양원에 사는 노인은 20여 명에서 100여 명으로 다섯 배가 됐다. 조씨는 "그만큼 자식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노인이 많아졌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했다. 세 살 아래 후배 이발사 윤동현(66)씨가 18년째 조씨를 돕고 있지만, 둘이서 100여 명의 이발을 끝내려면 7~8시간이 걸린다. 이발하는 날이면 두 사람은 오전 6시쯤 춘천에서 차로 출발해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간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조씨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가늘고 짧다.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는 초등학교로 끝이었다. 할 수 있는 일도 마땅치 않았다. 열여덟 되던 해 하사로 군 복무 중인 친형이 살던 강원도 양구를 찾았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동향 선배가 하는 이발소에 들어갔다. 거기서 배운 이발 기술로 집을 얻고 딸 셋을 어렵게 키웠다.
조씨는 매달 한두 차례, 이발소가 문을 닫는 날인 화요일에 요양원을 찾는다. 조씨가 노인들 머리를 만지면서 특별히 신경 쓰는 시기가 설과 추석 밑이다. 노인들은 이때만 되면 유독 머리 모양에 예민해진다. 자식들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라고 한다. 조씨는 "그렇지만 요양원에 있는 노인 가운데 20%가량은 명절에도 자녀들 얼굴을 못 본다더라. 머리를 깎으면서 말동무도 되어드리고 하는 게 보람"이라고 했다.
그 사이 세상을 뜬 노인도 적잖다. 102세였던 노인은 조씨가 지난해 10월 머리를 깎아준 게 마지막이었다. 조씨는 최근 허리 통증에 시달린다. 장애 때문에 한쪽 다리에 제대로 힘을 줄 수 없어 생긴 것이다. 이번 설을 앞두고 통증이 심해졌지만, 반갑게 맞아주는 노인들 얼굴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조씨는 "그래도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올 자식들을 기다리는 노인들을 생각하면 한 분이라도 더 멋지게 이발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올 설에는 더 많은 자녀가 요양원 노인들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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