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네가 누구든, 말과 피부와 고향이 얼마나 다르든

미카 가수·유엔난민기구 서포터 입력 2016. 1. 2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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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서 태어나 파리서 자라 가수 된 후 수 차례 베이루트 방문.. '이민자' 정체성 자랑스러워 레바논서 만난 시리아 난민들, 의지·유연함 지니고 어려움 맞서 인간성의 숭고함 새삼 느끼게 해

나이가 들수록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가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 되어가고 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출신입니까?"

나는 특정 국가 출신이 아니다. 오늘날 내 삶은 나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조부모와 친척, 가족들의 삶과 문화가 만들었다. 조부는 시리아인으로 당나귀 등에 전 재산을 싣고 다마스쿠스를 떠났다. 레바논인 조모는 16세에 베이루트 코니시 지역에서 수상스키를 타다가 당시 58세인 할아버지와 만났다. 내 영국인 조모는 지나칠 정도로 우아한 와스프(WASP·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로, 언변이 유창한 사바나 조지아 출신의 외교관과 결혼했다. 내 아버지는 이분의 아들이다. 예루살렘에서 낳아 카이로와 로마에서 키웠다.

나는 1983년 내전(內戰)이 한창이던 베이루트에서 태어났다. 내전 중 키프로스로 피신했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왔다. 파리 내 레바논 주민들 틈에서 자라면서 레바논 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나는 프랑스 사립학교에 다니는 미국인 소년처럼 보였지만, 레바논인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집에 깔린 카펫부터 접시에 담긴 음식까지 모두 레바논 것이었다. 부모님의 친구들도 레바논인이었다.

나는 프랑스인의 발음과 연한 피부색을 가진 덕에 문화적 차이를 느끼지 않고 유년 시절을 보냈다. 전쟁과 파괴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시기에 아버지가 출장을 떠났고, 우리 가족의 삶은 불안정해졌다. 사흘간의 쿠웨이트 출장길에 올랐던 아버지는 걸프전쟁에 휘말려 미국 대사관에 8개월간 인질로 잡혀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전쟁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경험했다. 분쟁 지역과 멀리 떨어져 산다는 것이 전쟁에 대한 공감을 막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두 개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는 프랑스인이었지만, 집에서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이때의 느낌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느낌이었다.

성인이 된 후 레바논인의 정체성을 잃은 적이 없다. 지난 2008년 7월, 나는 내전 당시 동베이루트와 서베이루트를 분리하는 무인 '녹색선 (Green Line)' 지역으로 알려진 순교자의 광장에서 첫 베이루트 콘서트를 열었다. 이후 나는 여러 차례 베이루트를 방문했고 나와 연관된 레바논, 그리고 전 세계 많은 사람이 그렇듯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먼발치에서 시리아 내전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성탄절 사흘 전, 나는 시리아 난민의 어려움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유엔난민기구(UNHCR)와 함께 레바논에 다녀왔다. 레바논은 전쟁과 파괴의 공포로부터 피신한 110만 명의 시리아 난민을 품고 있었다. 이들을 도우려는 기구들의 노력, 어마어마한 규모의 난민 인구를 맞아 준 레바논 주민들의 수고를 상상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내 두 눈을 열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단순한 수치와 논쟁거리가 되기 십상인 난민의 위기를 내면화하고 싶었다. 거리를 좁혀야만 했다. 나는 무방비상태로 난민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느꼈다.

방문을 마치고 몇 주가 지난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두 개의 단어는 '의지'와 '유연함'이다. 엄청난 위기에 대처하는 그들의 의지와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생존하기 위한 유연함을 봤다. 지나치게 딱딱하게 굳으면 폭력에 쉽게 부서진다. 공포를 이겨내는 방법은 이런 유연함뿐이다. 이와 같은 의지와 유연성의 결합이 인간의 가장 강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의지와 유연함이야말로 테러리스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인 동시에 너무도 많은 것을 잃은 난민들에게 희망과 안식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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