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佛 대통령機 타고 온 요리사.. "내 혀는 한국을 기억하네요"

송혜진 기자 2016. 1. 1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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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진 기자의 느낌] 한국 입양아 출신 '佛 스타 요리사' 피에르 상 보이에 "셰프 경연 TV 프로 나가 유명세.. 덕분에 은행대출 받았죠" 7세 때 프랑스 건너간 김상만.. 격식 없는 고급 요리 '비스트로노미' 열풍 주도

요즘 프랑스에서 '누벨 퀴진(새로운 요리)'을 이끈다는 피에르 상 보이에(Boyer·37)는 지난 6일 대뜸 "가락시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왜 가락시장이냐"고 묻자 그는 프랑스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로 대답했다. "굴비도 보고 복어도 보려고 한다. 거기 있는 아줌마들도 좋고(And I love them Ajumma in those markets)!" '아줌마'만큼은 우리말 그대로 발음했다.

보이에는 7살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요리사다. 7살 이전의 기억은 그저 새까맣다. 떠올릴 수 있는 건 처음 프랑스로 갔을 때 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파리에서 프랑스 남부 오베르뉴 지방에 있는 집에 도착하기까지 6시간을 차로 달려가는 동안 처음 보는 두 살 많은 '형'의 무릎을 베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는 것, 두 가지뿐이다.

30년이 흐른 지금,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이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해외를 순방하는 프랑스 최고 요리사 중 하나로 꼽힌다. 작년 11월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 함께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한국을 찾았다. 올랑드 대통령은 당시 청와대 영빈관 만찬에서 만난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이에를 "프랑스를 대표하는 요리사"라고 소개했다.

가락시장에서 만난 보이에는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 자연스럽게 돋아난 턱수염과 콧수염에, 추위로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었지만 시종일관 눈을 빛냈다. "저거 봤어요?"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마다 아가미를 벌린 채 얼어붙은 복어가, 주렁주렁 매달린 굴비가, 기름기 붙은 뱃살을 드러내고 누운 대방어가 보였다. 보이에는 다시 "저분들 좀 보라" 했다. 시장 한구석에서 아주머니들이 난로에 얹어놓은 고구마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보이에는 싱긋 웃었다. "저런 아줌마를 볼 때면, 저분들 중 한 명이 날 낳아준 엄마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의 입김이 뽀얗게 얼어붙었다.

佛음식 트렌드 이끄는 한국계 요리사

보이에는 재작년 뉴욕타임스에 두 번이나 소개됐다.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파리의 '비스트로노미(Bistronomie)'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비스트로노미는 격식 없이 음식을 즐기는 식당인 '비스트로(Bistro)'와 미식(美食)을 뜻하는 '가스트로노미(Gastronomie)'를 합친 말이다. 분위기는 캐주얼하지만 음식만큼은 최고급 식당 못지않다. 젊고 창의적인 셰프들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프랑스 요리다.

보이에는 2012년 파리에 '피에르 상 인 오버캄프(Pierre Sang in Oberkampf)'라는 레스토랑을, 2014년엔 '피에르 상 온 감베(Pierre Sang on Gambey)'를 냈다. 2012년 식당 문을 열 당시엔 전화 예약도 받지 않아, 매일같이 사람들이 줄을 서서 1시간씩 기다리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식당 앞에 줄 서서 기다리는 문화가 없다시피 한 프랑스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요즘도 그의 가게는 테이블의 절반만 예약을 받아주고, 남은 좌석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예약은 왜 안 받나.

"식당이 40석 정도밖에 안 된다. 워낙 작아서 처음엔 예약을 따로 받을 필요를 못 느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바람에 나도 좀 놀랐다. 요새는 홈페이지로 예약을 받는다."

―어떤 요리를 하나.

"그날그날 근처 시장에서 받는 재료로 매일 다른 요리를 한다. 정통 프랑스 요리만 고집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만든다. 한식을 활용할 때도 있는데, 가끔은 아스파라거스나 엔다이브(서양 배추의 일종)로 김치를 만들기도 하고 된장이나 고추장을 섞은 소스를 휙 뿌려 내기도 한다. 식용 꽃잎도 뿌린다."

―가격이 합리적이라던데.

"오버캄프에선 점심은 코스에 따라 20~35유로, 저녁은 6코스에 39유로(약 5만1000원)다. 감베는 저녁이 10유로 더 비싸고, 2층 좌석에 앉으면 88유로다. 오버캄프에서 식사하던 손님 중에서 조용하고 느긋한 분위기를 원하는 이들이 많아 감베를 냈고 2층 좌석은 따로 만들었다. 오버캄프에선 점심 시간에 7유로(약 9200원)짜리 비빔밥도 매일 판다. 식당 주변에 학교가 많은데 대학생들이 매일 샌드위치로만 밥을 때우는 게 좀 안타까워서 만들었다. 그들도 가끔은 제대로 밥 한 끼 먹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서."

보이에의 손님 중엔 유명인이 많다. 미슐랭 별 세 개를 자랑하는 프랑스 요리사 알랭 뒤카스, 조엘 로부숑, 세계 정상급 파티시에인 피에르 에르메도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보이에의 팬"을 자처한다.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와 화가 무라카미 다카시, 올랑드 대통령의 애인으로도 유명한 배우 줄리 가예도 그의 단골이다.

―작년 11월 올랑드 대통령과 사절단 자격으로 같이 한국에 왔다.

"올랑드 대통령과는 작년 9월 황교안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엘리제궁 오찬에 초대돼서 처음 만났다. 그러고 나서 10월쯤 어떤 여자분이 전화를 걸어와 "엘리제입니다"라고 했다. 난 그분 이름이 엘리제라는 줄 알고 "안녕하세요, 엘리제"라고 인사했는데, 알고 보니 엘리제궁에 있는 대통령 비서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11월에 한국에 가는데 나를 사절단으로 함께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가다니, 잠깐 꿈인가 생각했다.(웃음)"

―플뢰르 펠르랭 문화통신부 장관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겠다.

"그분도 나처럼 한국계이다 보니 이야기를 종종 나눴는데 서로 비슷한 걸 느끼고 있는 것 같더라. 한국에 가고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이 우리에겐 꼭 기쁘거나 벅차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있다. 그립지만 때론 밀어내고 싶기도 한 그런 것. 한국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까진 사실 시간이 좀 필요하다."

나를 눈 뜨게 한 엄마 밥과 장모님 밥

피에르 상 보이에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프랑스로 입양됐다. 당시 서류에 적힌 한국 이름은 김상만이었다. 오베르뉴에서 만난 보이에의 부모는 보이에에게 한국에 대해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를 리옹에 있는 한글학교에 보냈고 이름에 '상만'이라는 두 음절을 넣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담당 공무원 실수로 이름은 '피에르 상만 보이에'가 아닌 '피에르 상 보이에'가 됐다. 보이에는 "여러 번 변경 신청을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중에 자라선 서류에 남은 친부모님 기록을 보고 연락도 해봤는데, 알고 보니 거기에 적힌 부모님 이름은 모두 진짜가 아니었다"고 했다.

―프랑스 부모님과 가족들 영향을 받아 요리사가 됐다고 들었다.

"입양이 된 다음 해인 8살 무렵에 세례를 받았다. 그때 어머니가 파티를 연다면서 3~4일 동안 음식을 계속 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테이블 위에 고기 요리, 파이, 샐러드 같은 것이 잔뜩 차려져 있던 풍경이 아직도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그때부터 요리가 좋아졌던 것 같다. 늘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면서 음식을 만들어 어머니께 드렸고, 자연스럽게 고향에 있는 요리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몽펠리에에 있는 대학에서 요리와 호텔 경영학을 공부했고 그 후 프랑스 여러 도시를 돌면서 식당에서 요리 수련을 했다. 2003년엔 런던 식당 '클럽 가스콩(Club Gascon)'에서 일했다. 2004년엔 한국에 들어와 이태원 '르 쌩떽스(Le Saint-Ex)'에서 5개월 정도 일했다."

―그때 왜 한국에 왔나.

"항상 호기심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난 그 나라는 어떤 곳일까. 그때 처음 된장찌개와 식혜 같은 것들을 먹었는데 뜻밖에도 몹시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국을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혀는 여전히 한국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을 수도 있겠다."

보이에는 이때 바로 옆 식당에서 매니저를 했던 지금의 아내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이듬해 9월 결혼했다. 아내와 런던으로 돌아가 '르 서클(Le Circle)'의 헤드 셰프로 일했고 2008년엔 다시 프랑스 리옹으로 옮겨갔다. 2011년엔 셰프 경연 TV 프로그램인 '톱 셰프' 프랑스판에 출연, 최종 3인에 들면서 화제가 됐다. 보이에는 "고향 친구가 내게 알리지도 않고 출연 신청을 해줘서 나갔다"고 했다. 방송에서 보이에는 특유의 해맑고 자유로운 스타일을 마음껏 보여줘서 '프리 스타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캠핑 요리편을 촬영할 땐 근처에 있던 아이들을 끌고 산으로 올라가 산딸기를 따느라 내려오지 않는 바람에 제작진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방송이 요리사로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됐을까.

"그 덕분에 은행 대출을 받았다.(웃음) 아버지는 사업을 오래 하신 분이라서 내가 무작정 식당을 여는 것을 계속 반대했는데, 방송이 끝난 직후엔 아버지도 '이젠 네 식당을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하셨고."

―이후 한국에 있는 처가에 드나들면서 한국 음식에 또 한 번 눈을 뜨게 됐다고 하던데.

"장모님은 전북 군산 출신이고, 장인어른은 경북 청도 분이다. 장모님은 경상도와 전라도 음식을 모두 잘하신다. 고추도 직접 말려서 빻고 김치와 젓갈도 직접 담그신다. 처가에 갈 때마다 각종 장과 젓갈을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먹어볼 수 있었다. 오이소박이나 갓김치, 말린 생선과 각종 육포, 새우젓과 멸치젓…. 그게 다 내 요리의 자양분이 됐다. 나의 미식 세계를 넓혀준 셈이다."

보이에의 요리엔 요즘도 새우젓 소스나 된장 소스, 오징어 젓갈 같은 것들이 프랑스 요리 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올라온다.

"나는 입양아? 아니, 행운아"

보이에의 레스토랑엔 현재 20여명의 직원이 일을 한다. 성별·인종·출신 국가가 다양하다. 보이에는 "이들의 출신 국적만 11개국이 넘는다"고 했다. 이 중 두 명은 한국 출신이다. 이성대(30) 이노선(33) 셰프다. 이성대씨는 한국에서 10년 넘게 요리를 하다가 다른 일이 하고 싶어 파리로 건너 왔다.그런데 정작 보이에를 만나면서 다시 요리를 시작하게 됐다. 이노선씨는 영국 런던에서 건축학 공부를 할 때 학비를 벌기 위해 식당에서 일하다 요리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보이에는 "이 두 한국인 셰프가 내겐 무척 큰 힘이 되는 동료"라고 했다.

―입양된 한국인 중에는 일부러 한국인과 교류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당신은 그 반대다.

"이게 나니까.(웃음) 입양돼 프랑스에서 자랐고 지금은 프랑스인이다. 그렇지만 내 뿌리는 여전히 한국에 닿아 있기도 하다. 그게 나를 만들고 내 요리를 만들었으니 구태여 부정할 생각은 없다."

―슬픈 과거가 당신에겐 오히려 지금 자양분이 됐다는 이야기인가.

"정확하다. 나는 오히려 운이 무척 좋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서 다른 나라로 보내졌을 것이다. 한국에서 계속 자랐다면 굶어 죽었을 수도 있고,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도 좋은 부모님을 만났고, 따뜻한 가정에서 행복이 뭔지 제대로 배우면서 자랐다.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땐 불어를 전혀 몰라서 꿀 먹은 벙어리와 다를 게 없었다. 자전거도 탈 줄 몰랐다. 난 그래서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 얼른 적응해야 했으니까. 그 덕에 지금의 내가 됐다. 보다시피 난 서양인인 동시에 동양인이다. 프랑스 요리를 하지만 한국적인 맛을 낸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니 이건 오히려 축복이다."

보이에의 아내는 "남편은 어떤 힘든 일을 겪어도 태평한 편이다. 항상 '난 이미 가장 나쁜 일을 일곱 살에 겪었으니까, 이제부턴 좋은 일만 생길 거야'라고 말한다"고 했다. 아내는 남편을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쌍둥이 남매의 아빠다. 이 두 남매가 지금 딱 일곱 살이라고 들었다.

"맞다. 내가 입양됐을 때 딱 그 나이…. 그래서일까,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 기분이 묘하다.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7살 이전의 기억이 생각나질 않는데, 지금 우리 아이들을 보면 어른과 다를 게 없다. 다 기억하고 이해한다. 그런 걸 보면, 나의 기억은 어쩌면 잊힌 게 아니라 나의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

보이에의 아들 이름은 마루이고 딸 이름은 아라다. 만화영화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했다.

―셰프로 일하는 것 이상의 큰 꿈이 있나.

"나처럼 어릴 때 버림받았던 사람들, 입양된 소년 소녀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 이들을 위한 요리학교를 열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식당을 내고 싶다."

보이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에게서 명함 한 장을 받았다. '피에르 상 인 오버캄프'와 '피에르 상 온 감베'의 주소가 앞뒤로 적힌 명함이었다. 자세히 보니 오버캄프의 로고는 작은 꽃봉오리였고 감베 로고는 막 피어난 한 떨기 꽃이었다. "이건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내가 심은 요리의 세계에서 막 꽃봉오리가 돋아났고 그게 자라서 꽃이 됐다는 뜻이다."

―그럼 세 번째 로고는 뭐가 될까.

"글쎄, 가지가 더 자라날 수도 있을 테고 또 다른 꽃이 한 송이 더 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옮겨와 프랑스에 심어진 나무와도 같은 존재니까. 이 나무의 가지가 더 길게 길게 자라난다면 언젠간 다시 한국이라는 땅에 또 닿고 거기에 씨가 떨어져 또 다른 싹을 틔울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나무는 그래서 더 크고 싶고 더 자라고 싶다."

―혹시 친어머니를 다시 만난다면 뭐라고 말하고 싶은가.

보이에는 잠시 말을 아꼈다. 이윽고 깊은숨을 들이쉬더니 말했다. "밥 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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