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르지만 행복했다, 난 배우였으니"

유석재 기자 2016. 1. 11.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원로 배우 백성희 별세] 1943년 연극 '봉선화'로 데뷔, 400여 작품 출연한 '천의 얼굴'.. 九旬 직전에도 무대 올라 "기초 모르면서 말부터 쏟아내는 배우는 불편하다" 말하기도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실연 때문에 울고 있는 손자에게 다가가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라며 따뜻하게 위로해 준다. 할머니는 화사한 봄날,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양산을 펴든 채 대문을 나선 뒤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유지태 주연 영화 '봄날은 간다'(2001)의 할머니 역은 대중이 친숙하게 기억하는 원로 배우 백성희(白星姬·91)씨의 모습이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평생 모르는 채로 그 길을 걸어왔다. 내 삶의 전부이자 유일한 여정이었다. 미친 짓이지만 행복했다. 난 배우였으니까."(회고록 '연극의 정석' 중) 한국 연극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던 그가 지난 8일 밤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진행해 회고록에 수록한 김남석 부경대 교수는 "석 달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갑자기 건강이 악화돼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고 말했다.

본명이 이어순이(李於順伊)인 백씨는 192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동덕여고에 다니던 17세 때 빅터무용연구소에 연습생으로 들어갔고, 1943년 유치진이 대표로 있던 극단 현대극장의 '봉선화'(함세덕 작·연출)로 데뷔했다. 배우 한 사람이 갑자기 공연을 못 하게 돼 개막 5분 전에 맡은 '벼락 대역'이었다고 한다.

1944년 작가 나도향의 동생 나조화씨와 결혼한 그는 광복 후 극단 신협(대표 이해랑) 등을 거쳐 1950년 국립극단 창단 단원으로 합류했다. 처음엔 주로 현대적인 신여성 역할을 맡으면서 주연급으로 급성장했다. 1972~74년과 1991~93년 두 차례 국립극단장을 맡았다. 배우들은 그때의 백씨를 "낮엔 연극 연습에 몰두하고 밤엔 창(唱)과 춤을 배우면서도 늘 연극인들의 처우 개선에 앞장섰던 이"로 기억한다.

그는 연극 '뇌우'(1950)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 '만선'(1964) '무녀도'(197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81) 등 4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달집'에선 40대 초반에 70대 할머니, '장화를 신은 고양이'에선 50대 후반에 18세 소녀로 변신할 정도로 '천의 얼굴'이었다. "작품은 가려도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한 인터뷰에선 "중요한 건 기초"라며 "기역 니은도 모르면서 말부터 쏟아내려는 배우들을 볼 때마다 앉아 있기 불편하다"고 했다.

노년이 돼서도 무대에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2010년 그의 이름을 딴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개관 기념작 '3월의 눈'에서 고 장민호씨와 함께 주인공 부부로 나왔다. 마지막 출연작은 2013년 '바냐 아저씨'의 마리야 역이었다.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고, 은관문화훈장(2010)과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4), 이해랑연극상 특별상(1996) 등을 받았다. 유족은 아들 나결웅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12일 오전 8시 30분이다. 영결식은 이날 오전 10시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대한민국 연극인장으로 치러진다. (02)3010-2232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