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부도·노숙.. 날 일으켜 세운 건 '5000원 잡지'

유소연 기자 입력 2015. 12. 29. 03:06 수정 2015. 12. 29.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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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2015, 희망 릴레이] [2] '빅이슈' 판매원으로 재기한 임형근씨 "지하철서 물건 팔며 생계.. 결핵 치료 못해 쓰러지기도 매일 5시간 목발 짚고 일해 내년 고시원서 임대주택 이사.. 젊은이들 보며 힘 얻었죠"

지난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출구 앞 사거리. 오른팔로 목발을 짚은 임형근(54)씨가 왼손에 잡지를 높이 들고 "빅이슈 팝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며 연방 팔을 흔들었다. 잡지 '빅이슈코리아' 판매원으로 일하는 그는 올 한 해 평일 오후 3시부터 8시까지 이곳에서 1부에 5000원 하는 이 잡지를 팔아왔다.

'빅이슈'는 1991년 영국에서 창간한 대중문화 잡지로 노숙인 등 취약 계층에만 판매권을 줘 이들의 자활을 돕는 매체다. 한국에서는 2010년 7월 '빅이슈코리아'가 창간됐으며, 배우 송일국과 가수 아이유, 셰프 최현석 등 유명 인사들이 이 잡지 표지 모델로 나섰다.

이날 임씨의 첫 손님은 대학생 한수영(여·23)씨였다. 한씨는 "종로에 있는 학원에 올 때마다 항상 웃으며 맞아주는 기분 좋은 아저씨"라며 "매월 두 번 잡지가 새로 나오는 날은 꼭 들러서 산다"고 했다. 청계천 주변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나 종로 일대 외국어학원에 다니는 대학생, 취업 준비생 등이 그의 단골이다. 임씨는 "내가 웃는 얼굴을 보여야 길 가던 손님들도 좋은 에너지를 얻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동안 고시원에서 생활해온 임씨는 새해에는 임대주택에 새 보금자리를 얻는다. 그는 지난 1년 3개월간 공덕역·강남역·잠실역·종각역 근처에서 잡지를 팔아 월 80만원 남짓을 벌어왔다. 고시원비 23만원과 생활비 등을 빼고 남은 10만원 안팎을 꼬박 저축해 6개월 전 임대주택 보증금 150만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입주 절차가 거의 완료돼 집만 고르면 된다.

임대주택 입주는 6년 전만 해도 종로 일대에서 노숙했던 그에게 새 인생의 출발이다. 부산이 고향인 임씨는 열세살에 초등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소아마비에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크던 임씨는 '서울엔 장애인이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무작정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 뒤로 가방 공장에 취직해 일을 배우다가 21세에 공장을 직접 차렸다. 한때는 직원이 50명이나 될 정도로 공장이 잘됐다. 하지만 1998년 외환 위기 직후 일감이 급감하면서 부도를 맞고 말았다.

순식간에 사업체를 잃은 그는 지하철 잡상인으로 부채·손수건·구둣주걱 등을 팔며 생계를 이었다. 그러던 2008년 1월 길을 걷다 쓰러져 3일 만에 의식을 차렸다. 병원비 때문에 차일피일 치료를 미뤄온 결핵이 원인이었다. 1년 4개월간 병원 신세를 지고 2009년 봄 세상으로 나왔을 때 임씨 수중엔 14만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갈 곳은 거리밖에 없었다. 한 달간 노숙 생활을 하다가 지인의 도움으로 노점상을 시작해 찜질방이나 여관을 전전했다. 그러다 2010년 가을 즈음 한 봉사 단체에서 월세 한 달치를 지원받아 고시원 한 칸을 겨우 얻었다. 이씨는 "한 평짜리 고시원이지만 몸을 누일 때마다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해 겨울 '빅판(빅이슈코리아 판매원)'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병으로 쇠약해진 몸이 또 탈이 나 2년도 안 돼 일을 쉬게 됐다.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으며 2년간 더 요양한 끝에 지난해 10월 건강을 회복해 거리에서 다시 잡지 판매에 나섰다. 임씨는 "하루 다섯 시간씩 목발을 짚고 큰 소리로 손님을 끄는 일이 쉽지만은 않지만, 사회로 나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힘을 얻고 있다"며 "임대주택에서 새로 출발하는 내년에는 나도 사람들에게 희망의 웃음을 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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