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의 르네상스人] "난 족보에 없는 존재.. 말하자면 변종 디자이너"

어수웅 기자 입력 2015. 12. 16. 03:04 수정 2015. 12. 1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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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연구가 박해천 교수] 디자인·소설·영화 종횡무진 '아파트..' 등 이종교배 글쓰기 삼성 임원이 많이 읽는 책 꼽혀 테크놀로지 세대 '젊은 멘토'로

올망졸망한 인쇄소가 모여 있는 을지로 뒷골목. '여기인가' 하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더니 한 집 건너 당구장 있는 '○○빌딩'이란다. 빌딩이란 호명이 민망한 낮고 낡은 건물 3층에 그들의 '아지트'가 있다. 괴짜 그래픽디자이너, 자타칭 정치·사회평론가, 패션 칼럼니스트, 미술관 큐레이터, 그리고 그들의 '젊은 멘토'. 어울리지 않는 디지털 도어록의 303호 출입문이 특유의 전자음을 내며 열렸다. 이 방 젊은 예술가들이 '선생님'으로 부르는 박해천(44)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가 사진기자 난처하게 만드는 경직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는 자칭 변종 디자이너. 카이스트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박사과정까지 들어갔지만 손으로 그리는 그림을 스스로 포기했다. '엄마 몰래 동전 훔쳐 전자오락실에 출근부를 찍던 첫 세대'의 소년은 컴퓨터로 그리는 그림이 훨씬 편했고, 방학이면 중앙도서관에서 줄기차고 집요하게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석사 논문을 쓰며 결심했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디자인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

이 업계에서 그는 '족보에 없는' 존재다. 동기 중 유일하게 군대를 갔고, 병역 특례로 삼성전자 LG전자 입사하는 선후배들 무심히 바라보며 키보드를 쳤다.

글 쓰는 디자이너는 없지 않겠지만, 이렇게 글 쓰는 디자인 연구자를 본 적이 없다. 장르적으로는 문학과 영화와 사회학을 가로지르는 이종 교배 글쓰기, 그리고 스케일로는 사물과 이미지의 평면적 차원을 넘어 도시 규모로의 공간적 확장이다.

일편단심 바뀌지 않는 주제는 아파트와 중산층. '20세기 디자인의 역사는 사실상 중산층의 역사이고, 한국 중산층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아파트의 역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모음 刊), '아파트 게임'(휴머니스트), '아수라장 모더니티'(워크룸 프레스) 등 소위 그의 '콘유 3부작'에는 60년대 이층 양옥, 쾌속 질주 마이카 포니, 분당과 일산 신도시의 아파트가 인격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허구의 회고담에는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 김원일의 '어둠의 축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 정이현의 '비밀과외' 등 노장청(老長靑) 수십명 소설가의 작품이 녹아 있다. 스스로 '착취'라 반성하는 무차별 인용인데, 독자 입장에서는 60년대 이후 각 세대 중산층의 라이프 스타일과 시각 문화를 들여다보는 최고의 현미경이다. '아파트 게임'은 삼성 공식 블로그가 선정한 '정치 경제 전반을 통찰하려는 삼성 임원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 5'(2014년 9월)에 꼽히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삼성 임원들의 예상과는 다른 독서 체험이었을 것이다. '아파트 게임'을 포함한 이 글들은 아파트가 재산 증식 수단이었던 오르막 시대 아버지의 시선이 아니라 내리막 세상을 살게 된 아들 세대의 시선으로 중산층 문화의 위축을 차갑게 쓰고 있으니까.

하지만 불투명한 시대에 필요한 것은 근거 없는 낙관보다 냉정한 현실 인식일 것이다. 대안이 없는 건 아쉬웠지만, 그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몫을 다한다고 믿고 있었다.

당대의 문학이 골방에 갇혀 현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는 독자들에게 시각 문화와 문자 문화의 아찔한 격차를 자유자재로 활강하는 박해천의 종횡무진 글쓰기는 매혹적이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과 시흥시 등 지자체에 이르기까지 올 한 해 20여곳에서 강연했고, 재능과 열정 있는 청춘들에게 뜨거운 화제였던 전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와 '확률가족'(책) 역시 그의 기획이었다.

우리 모두는 2015년을 살고 있지만, 모두에게 공평한 당대(當代)는 아니다. 개인이 경험하는 디지털과 현실 세계의 폭과 깊이는 제각각. 어쩌면 그에 대한 후배들의 뜨거운 지지는 디자인과 관련된 테크놀로지 조건에서는 구미 중심부와의 시차(時差)를 극복하고 이를 설득력 강한 글로 펼쳐내고 있는 세대의 출현에 대한 경의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밤이면 침묵하는 도심 뒷골목 월세 55만원 아지트에서 젊은 예술가와 그들의 젊은 멘토는 "초치기하다 영혼이 증발되어버린 인생"이라 푸념하며 24시간 마감에 열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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