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흙 보니 조국 온 게 실감 나네요"

최연진 기자 2015. 12. 8.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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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계 첫 美 미주리주 판사, 한국계 혼혈 드레이퍼 방한 입양인들 인권 위해서도 활약

"옆집 아이들이 제게 돌을 던졌어요. 이유는 하나,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이죠."

1955년 주한 미군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여자아이 '평화(peace)'가 태어났다. 한국말밖에 하지 못하던 평화와 어머니는 1959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 피부색 때문에 이웃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40년 넘게 차별과 싸운 끝에 평화는 미주리주(州) 순회법원 판사가 됐다. 아시아계 혼혈인이 미주리주에서 판사가 된 것은 처음이다. 주디 드레이퍼(60)라는 이름으로 '어머니의 나라'에 온 그를 여의도에서 만났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정부 측 사람이 나와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2011년 이후 4년 만에 다시 한국에 온 드레이퍼 판사는 "한국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외교부가 임명한 명예영사로서, 다른 명예영사들과 만나기 위해 정부 초청으로 왔다.

어릴 적 '평화'라는 이름은 외할머니가 지어줬다. 하지만 몇 년 만에 잊혔다. 혼혈인, 특히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 때문에 의식적으로 한국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한국어를 쓰면 학교 친구들이 놀렸어요. 그래서 엄마에게 '한국어를 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저를 때리면서 안 된다고 했지만, 듣지 않았죠." 드레이퍼 판사는 "나는 혼혈인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열심히 공부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했다.

판사가 된 때는 '차별과의 싸움'이 결실을 거둔 순간이었다. 미주리주는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이 심한 편이었다. 세인트루이스시(市) 검사, 기업 변호사, 미주리주 교정국장을 거치며 경력을 쌓은 그는 2004년 아시아계 처음으로 미주리주 판사가 됐다. 남편인 조지 드레이퍼(62) 미주리주 대법관 역시 흑인 최초로 대법관이 된 인물이다.

그는 미국 내 혼혈인뿐 아니라 입양인의 인권을 위해서도 활동하고 있다. 입양인을 위한 봉사단체 '미앤드코리아'에서 활동하며 입양인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돕고 있다. '한국인임이 싫었다면서 왜 이런 활동을 하느냐'고 묻자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가 한국인이니까요." 그는 "이 흙, 이 땅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게 가슴으로 느껴진다"며 "정체성을 부정하기보다는 잘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드레이퍼 판사는 인터뷰하던 날 길에서 넘어져 어깨뼈가 부러졌다. 수술 때문에 급히 미국으로 가면서 "한국에 꼭 다시 오고 싶다"고 했다.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운 좋게 판사가 된 만큼, 같은 한국인들에게 내가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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