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통합과 평화의 설계자 독일의 위대한 현자 떠나다

2015. 11. 12.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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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슈미트 前 독일총리 1918∼2015
[동아일보]
“위대한 유럽인이 떠났다.”

10일(현지 시간)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가 96세 나이로 독일 함부르크 자택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에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한 말이다. 그는 외국 정상 중 가장 먼저 성명을 발표했다. 슈미트 전 총리가 재임 시절 프랑스와 정례 경제협력 채널을 가동하면서 오일쇼크에 따른 경제위기를 유럽 통합의 발판으로 삼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통독 전 동독에서 줄곧 성장했지만 서독 함부르크 태생이기도 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날 TV 생중계로 발표한 추모 연설에서 고인과의 개인적 추억을 언급하기도 했다.

메르켈 총리는 “고인이 함부르크 시정부에서 경찰 담당으로 있던 1962년 이 지역에 기상 재난이 닥쳤는데 라디오를 통해 당시 인기가 높았던 ‘슈미트’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며 “지금의 G20(주요 20개국)의 맹아였다고 할 수 있는 프랑스와의 경제협력협의체 가동, 적군파 테러 억제, 소련 위협에 맞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한 양면전략 등 슈미트의 판단력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고인은 하나의 ‘정치 기관 자체’”라고 했다.

냉전시대 서독의 부흥을 이끌면서 ‘최고의 현자(賢者)’로 불리며 독일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았던 전직 총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타계 소식에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추모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세계적 비전을 가졌던 독일의 글로벌 총리’(영국 가디언), ‘독일과 프랑스, 유럽의 과거사 화해 협력의 예술가’(프랑스 르몽드), ‘냉전시대 좌파 테러리즘에 맞섰던 합리적인 중도 리더’(월스트리트저널)….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유럽은 정치적 용기로써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던 특별한 인물을 잃었다”고 베르너 파이만 오스트리아 총리는 “평화와 통합의 유럽을 설계한 중요한 정치인이 눈을 감았다”고 슬픔을 표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고인은 후임자인 헬무트 콜 전 총리가 독일 통일이라는 과업을 마무리할 수 있게 기반을 제공한 사람”이라고 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슈미트를 ‘세기의 조종사(Pilot of Century)’로 평가했다.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 출신의 고인은 1974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보좌관의 간첩 행위 파동으로 물러난 후 총리로 선출된 이후 1982년까지 8년간 냉전시대 서독의 최고지도자로서 독일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전임자인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동독에서 구소련 및 동유럽으로 확대 발전시킨 ‘데탕트 외교’로 독일 통일의 초석을 마련했고, 프랑스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과 정례 경제협력틀을 마련해 유로화 체제의 기틀을 닦았다.

1977년 적군파 테러 광풍이 몰아쳤을 때에는 적군파에 피랍된 한스마르틴 슐라이어 독일산업연맹(BDI) 회장이 희생되는 불상사 속에서도 승객들을 구해내 ‘슈미트 리더십’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또 구소련의 SS20 중거리 핵미사일의 배치로 안보위기가 닥쳤을 때에도 소련과 협상하되, 실패 시 독일 중심으로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한다는 양면 전략을 구사해 나토의 중심을 잡았다.

정치계를 떠난 뒤에는 주간지 디 차이트의 공동발행인으로 변신해 저널리스트 겸 저술가로서 국내외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을 해왔다. “정상회담은 최선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피하는 것” 등 ‘촌철살인의 어록’으로 사랑받았다.

고인은 2005년 독일의 정치인, 문화인, 예술인, 체육인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 96%의 지지를 받아 ‘최고의 현자’로 선정됐다. ‘애연가’로 유명해 담배와 관련한 일화도 많다. 총리 재직 시 흡연이 허용된 TV 인터뷰에서는 1시간여 방송 동안 담배 10개비를 해치워 화제가 됐으며, 90세가 넘어서도 줄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노익장’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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