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성지에 서는 것은 속살까지 드러내는 일"

2015. 11. 1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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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바그너 스페셜리스트’ 베이스 연광철

소년은 공고를 나와 가난한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12살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충북 시골 출신이었다. 고3 때 건축기능사 2급 자격시험에서 떨어졌다. 장래 꿈이 무너지는 순간, 그는 불현듯 성악을 떠올렸다. “중학교 때 슈베르트의 ‘숭어’를 들었어요. 내 목소리와 비슷해 성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에선 ‘공고생이 무슨 성악을 하겠느냐’며 못 미더운 반응이었죠. 석 달 공부해서 청주의 음대에 붙었습니다. 그때 저를 묵묵히 응원하던 아버지는 소를 팔아야 했고요.”

소년은 세계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최고의 베이스 가수 연광철(50) 서울대 교수다. 묵직하고 따뜻한 음색의 그는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권유로 1996년부터 ‘바그너의 성지’ 독일 바이로이트 무대에 오르는 ‘바그너 스페셜리스트’다.

‘따뜻한 음색’ 최고의 베이스
1996년부터 바이로이트 무대에
다음주 국립오페라단이 올리는
바그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출연

연광철의 삶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꾸자”는 체 게바라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건축기능사라는 소박한 현실주의자의 꿈으로부터 마침내 세계적인 성악가로 ‘불가능할 것 같은’ 변신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예술학교,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를 거쳐 1993년 제1회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18년까지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영국 코번트가든 로열오페라, 이탈리아 라 스칼라 등 세계 정상급 무대 일정이 빼곡하다. 그는 다음주엔 국립오페라단이 올리는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고래잡이 배의 달란트 선장으로 출연한다.

바그너가 직접 대본을 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1974년 번안본 <방황하는 화란인>으로 국내 초연됐다. 41년 만에 오르는 이 작품의 무대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남쪽 바다를 항해하는 고래잡이배다. 무한히 바다를 떠도는 저주에 걸린 네덜란드인 선장이 주인공이다. 그의 저주는 영원히 사랑해줄 여인을 만나야 풀린다. 바그너가 성악과 연극의 균형을 시도한 음악극(Musikdrama) 형식을 완성하기 전 작품이라 이탈리아 오페라와 가까운 형태다.

“바그너가 이 작품과 ‘로엔그린을 할 때만 해도 벨리니처럼 이탈리아 벨칸토(노래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기교적 창법) 음악과 가까웠습니다. 파르지팔, 링(반지) 4부작, 트리스탄과 이졸데같이 무겁고 사변적인 후기 작품이 아니어서, 우리나라 관객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겁니다.”

연광철은 지난해 바이로이트에서 세 작품을 연속으로 했다. “바그너가 설계하고 바그너 작품만 공연하는 무대에 서는 것은 영광입니다. 몇 십년 동안이나 바그너를 들으며 악보까지 다 외우는 관객들이 수두룩합니다. 세계 유수 극장에서 바그너를 했던 가수들도 바이로이트에서 혹평과 야유를 받을 정도지요. 영광스럽지만, 도마 위에 올라 속살까지 드러내는 생선이 돼야 하는 무대입니다.”

“독일에서 만난 베이스들은 어둡고 나무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나는데, 저는 가볍고 따듯한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연광철은 목소리만큼이나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저는 지금의 성취가 없더라도, 시골 음악선생을 하면서도 만족하며 잘 살 겁니다. 하하하.” 지휘 랄프 바이케르트, 연출 스티브 롤리스, 연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오는 18, 20,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02)580-1330.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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