廢소방호스, 패션가방으로 다시 태어나다

변희원 기자 입력 2015. 11. 9. 03:04 수정 2015. 11. 9. 14: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파이어마커스'의 이규동·박용학씨] 아버지가 소방관인 이규동씨, 못 쓰는 소방호스 모아 가방·카드 지갑 만들어 판매.. 수익금으로 소방 장갑 선물

소방관이 되려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이규동(27)씨는 지난해 소방호스로 가방을 만드는 영국 브랜드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경기도 소방서에 근무하는 소방관 아버지와 호서대 소방방재학과 선후배들이 떠올랐다. '한국에도 버려진 소방호스가 많을 텐데, 이걸로 가방을 만들면 소방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소방 공무원 시험 준비나 하라"면서 아들이 가방 만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도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직장에서 폐(廢)호스를 가져와 말없이 아들에게 건넸다. 소방호스로 제작한 가방을 파는 '파이어마커스'는 이 부자로부터 시작됐다. 브랜드 이름은 '화재의 흔적'이란 뜻에서 가져왔다.

지난 2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9평짜리 오피스텔. 이규동씨와 동갑내기 친구 박용학씨는 소방호스로 만든 카드 지갑과 메신저백(우체부들이 메는 가방을 본떠 만든 가방) 500개를 배송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가방 주문을 받았는데 애초 예상했던 100개보다 물량이 다섯 배나 늘어났다.

가방 판매 수익금으로는 구조용 장갑(개당 6만5000원)을 사서 소방관에게 보낸다. 창업 때부터 품은 뜻이다. 박씨는 "최근까지는 가방이 잘 안 팔려서 장갑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주신 한두 분한테만 장갑을 사드렸다. 이번에는 수십 개씩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어렸을 적엔 집에서 종종 술을 드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땐 소방관인 아버지 모습을 못 봤거든요. 대학에 간 뒤 소방관에 대해 알게 되면서 동료들의 죽음, 시민들의 폭언 등을 겪었을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됐어요. 그래서 소방관의 흔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죠."

아버지에게 받은 소방호스를 가지고 이씨는 주변에 조언을 구했다. "호스를 만들던 천으로 어떻게 가방을 만드느냐"거나 "더러운 천으로 만든 것을 누가 사겠느냐"는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소방호스를 들고 방에 들어가서 재봉틀을 돌렸다. 이튿날 아버지는 쇼퍼백(어깨에 멜 수 있는 직사각형의 큰 가방)을 내밀었다. 이씨는 "아무 말 없이 가방만 놓고 가셨다. 속으로만 응원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이씨는 이 가방을 들고 '소방호스로 가방을 만들 수 있다'고 투자설명을 하고서 지난해 4월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사회적기업육성사업'에 선정됐다. 그때 지원받은 2000만원이 종잣돈이었다.

이씨는 집 마당에서 호스를 씻는 일부터 시작했다. 15m짜리 호스를 2~3m씩 자르고 안에 들어 있는 고무를 뺀 뒤 솔로 빡빡 문질렀다. 고등학교 때부터 미술을 하고 싶었던 박용학씨와 건축학도인 후배 박지원(25)씨가 '파이어마커스'에 합류했다. 두 사람이 디자인을 맡았다. 이 삼총사는 지난겨울 난방도 안 되는 이씨네 집 창고에서 호스를 자르고 재봉틀을 돌리면서 가방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판매한 가방 70개 중 20여개가 불량품일 정도로 실수투성이였다. 동대문과 창신동 '가방 상점'을 돌며 가방 만드는 공정을 다시 배웠다. 가방 장인을 찾아가 바느질을 배울 때까지 쫓아다니기도 했다.

지난 9월부터 SNS를 통해 '파이어마커스'가 알려지면서 소방호스로 만든 가방 문의가 급증했다. 소방관 남자친구를 위해 가방을 주문하는 20대 여성도 있었고,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와 "고맙다, 응원한다"는 말을 하고 끊는 사람도 있었다. 요즘에는 소방의 흔적이 많이 남은, 때탄 가방을 사겠다는 고객도 있다. 이씨의 아버지는 요즘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는 잔소리를 안 하게 됐다.

이씨는 "한 명의 소방관이 보호하는 시민이 1300명이란 데에 착안해 1300명의 시민이 한 명의 소방관을 응원하는 '1:1300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소방관을 응원하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와 메신저 이모티콘 등을 만들고 있다.

오늘(11월 9일)은 소방관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소방의 날이다. 이씨는 14일 서울 동작소방서에서 소방복을 활용한 패션쇼를 열 계획이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