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34번의 마라톤.. 34번의 인생

한현우 기자 2015. 11. 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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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우의 인간正讀] '한국 전산학 박사 1호' 카이스트 문송천 교수

"제가 컴퓨터에 처음 관심 가진 게 1970년입니다. 그때 전 세계 중·고생 가운데 컴퓨터에 입문한 사람이 20명 남짓 돼요. 그 학생 중에 중3이던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있었고 고3이던 제가 있었죠."

이 사람은 약장수가 아니다. 카이스트 교수다. 그는 중동고에서 전교 1등을 하다가 숭실대 전산학과에 입학했고, 카이스트 대학원 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24세에 대학교수가 됐다. 현재 카이스트 경영대학원에서 30년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마라톤을 34번 완주했으며 그때마다 기부한 금액이 도합 5000만원을 넘는다. 서울 압구정동 자택에서 홍릉 학교까지 매일 걸어서 출근했으며, 김포공항까지 걸어가 출장을 가기도 했다. 국내 인터넷 해킹·보안의 최고 전문가를 자처하는 문송천(63) 교수다. 매우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가진 문 교수가 최근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을 완주하고 또 1m에 10원씩 42만1950원을 기부했다기에 만나러 갔다. 서울 이문동 천장산의 단풍이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정에 붉게 내려와 있었다.

―할 말씀이 많은 인생을 사신 것 같습니다.

"사실 제 인생은 IT와 관련해서 특이하지 별로 특이할 게 없습니다. 대개 고등학교 때 진학 결정을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상의하지만 저는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기로 혼자 결정했지요. 그때 전교 1등이면 당연히 서울대 법학과나 행정학과를 지원했지만 저는 고2 겨울방학 때 컴퓨터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도 그때 컴퓨터에 관심 가졌다는 건 무슨 근거인가요.

"나중에 빌 게이츠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해준 얘기입니다."

전교 1등에서 숭실대 장학생으로

―고3 때까지 문과였다면서요.

"그래서 엄청나게 고생을 했죠. 수학이 달려서."

문 교수가 숭실대를 택한 것은 그때 전산학과가 있는 대학이 숭실대뿐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 생긴 숭실대 전산학과에 그는 2기생으로 입학했다. 그가 '한국 전산학 박사 1호'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79년이 돼서야 서울대와 이화여대에 전산학과가 생겼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울 인구 억제 정책 때문에 학과 신설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리 과 1기생들은 졸업하고 나서 대부분 호주와 캐나다로 취업이민 갔어요. 그때 우리나라에는 프로그래머를 뽑는 직장이 없었거든요. 저는 교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카이스트에서 수학으로 석사를 했고, 나중에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어바나샴페인)에서 컴퓨터공학으로 박사를 했죠."

그는 198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동기 50명 중 가장 빠른 3년 만에 박사를 따서 돌아왔다. 문 교수는 그 뒤 줄곧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컴퓨팅을 이미 30년 전에 연구했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요.

"제 박사 학위가 클라우드 컴퓨팅입니다. 그때는 '분산 처리 시스템(Distributed Processing System)'이라고 했지만 개념은 똑같은 거예요. 클라우드라는 게 전력 공급과 개념이 같습니다. 한국전력이 서울과 각 지방에 있지만 각 지역 전력만 공급하는 게 아니라 남는 것은 다른 지역으로 보내고 하는 식이거든요. 빅데이터 역시 그때는 수퍼 데이터 또는 베리 라지 데이터(Very Large Data)라고 불렀지만 역시 일리노이대에서 연구하던 것이죠."

―공부만 해온 인생인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전쟁 중(1952년)에 저를 낳아 개성에서 피란했습니다. 아버지는 목수 일을 하셨죠.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월간지를 팔아 학비를 댔고, 숭실대는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카이스트는 국비장학생만 뽑는 데고, 일리노이대 다닐 때도 미국 육군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면서 학비를 면제받았어요. 제가 운이 아주 좋습니다."

―마라톤은 왜 시작한 겁니까.

"숭실대 1학년 때 하루 2시간씩만 자고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장승배기 길바닥에서 쓰러졌어요. A형 간염이었는데 온몸에 황달이 번지고 숟가락 들 기운도 없었죠.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카이스트에 입학하면서 테니스를 치기 시작했는데 1999년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걷기 시작한 거죠. 사실 어렸을 때 제가 약골이었습니다. 고교 때 전교 1등에서 10등까지 오락가락했는데 특히 체육 점수가 안 좋으면 등수가 떨어졌죠."

압구정동에서 홍릉까지 걸어서 출근

문 교수의 테니스 실력은 지금도 아마추어 최고 수준이다. 그는 실제 1988년 전국 아마추어 테니스대회에 나가 우승했다. 그는 "요즘도 카이스트 학생들과 게임을 하는데 예전만 못해도 늘 6대3이나 6대4로 이긴다"고 했다.

1999년 처음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한 문 교수는 2000년부터 걸어서 출근을 시작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집을 나와 성수대교를 건너고 사근동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양대 캠퍼스를 한 바퀴 돈 뒤 서울시립대로 가서 한 바퀴, 이후 홍릉의 연구실로 출근했다. 총 12㎞ 구간이었고, 아침 7시 집을 나서면 어김없이 9시에 도착했다.

―하루도 빼먹지 않았습니까.

"2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걸어서 출근했습니다. 겨울 한강에 바람이 불면 영하 20도까지 내려갑니다. 그때 동상에 걸려서 눈 밑에 아직도 다크서클처럼 남아 있습니다."

―마라톤을 하려면 달려야 하지 않습니까.

"보통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매주 42㎞ 정도 조깅을 해야 마라톤을 소화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테니스를 열심히 했으니까 걷기만으로도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공항까지는 왜 걸어갔습니까.

"딱 두 번 압구정동에서 김포공항까지 걸어갔는데, 매일 걸어서 출근하다 보니까 한번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5시간 걸리더군요. 빠르지는 않지만 소요 시간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지금도 걸어서 출근하시나요.

"과천으로 이사한 뒤로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서 못 걷습니다. 요즘은 버스 타고 고려대 앞에서 내려 걸어오는데, 그건 걷는 게 아니죠. 가끔 서울숲에서 버스를 내려 예전처럼 한양대 찍고 시립대 찍고 와요. 그러면 한 9㎞ 됩니다."

마라톤 완주는 한 번의 인생과 같다

―마라톤의 매력이 무엇입니까.

"마라톤 한 번 할 때마다 인생 한 번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초반 5㎞는 살살 페이스 조절을 하며 뜁니다. 태어나서 걸음마하고 학교 다니는 시기죠. 이후 10㎞까지는 스스로 감탄하면서 신나게 달리죠. 우리의 20대와 같습니다. 15㎞가 지나면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하고 25㎞ 지점에서 큰 위기가 옵니다.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 걷기도 하지만 끝까지 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40대 때 '회사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30~35㎞에서는 너무 힘들어서 그냥 확 주저앉고 싶지요. 35㎞를 지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몸은 만신창이인데 마음은 날듯이 가벼워집니다. 이제 골인이 얼마 안 남은 것이지요. 온갖 풍파를 헤치고 노년에 닿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41㎞ 팻말을 만나면 문득 후회와 아쉬움이 몰려와요. '내가 왜 이렇게밖에 못 달렸나' '아까 더 힘을 냈으면 기록이 달라졌을 텐데' 하는 것이죠."

풀코스 마라톤을 5회 완주해 본 내게는 너무나 생생한 비유였다. 마라톤을 미친 짓 또는 못할 짓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의아한 수사(修辭)일 것이다.

―마라톤 1m에 10원씩 매번 42만1950원을 기부하셨죠.

"1999년 처음 완주한 뒤에 생각해 낸 겁니다. 마라톤은 혼자 완주하는 게 아니구나, 물 주고 바나나 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없으면 절대로 못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거죠. 그 뒤로 한 번 완주할 때마다 42만1950원을 냈고, 주변 교수들에게도 '내가 뛰는 1m에 1원씩 4만2195원만 내라'고 해서 모은 돈을 기부했어요." 그간 문 교수가 마라톤을 완주하면서 기부한 금액은 본인이 2000만원가량, 주변인들이 3000만원가량 해서 총 5000만원이 넘는다.

문 교수는 만 24세이던 1976년 숭실대 전산학과 조교수로 임명됐다. 카이스트 입학으로 군 면제를 받은 그는 석사 학위 취득 직후 교수가 됐다. "당시 공대 교수들은 대부분 석사 출신이었다"는 설명이다. 65세 정년이 되는 2017년 퇴임하면 그는 무려 41년간 현역 교수로 일하게 되는 셈이다. 그는 1979년 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최초의 컴퓨터 교과서를 집필한 사람이기도 하다.

24세에 교수… 컴퓨터 전공이라 가능

―24세 교수면 아마도 최연소 기록일 것 같은데요.

"모두 제가 법대를 가지 않고 컴퓨터를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죠. 그때 숭실대 총장이 '카이스트 석사는 MIT 석사와 똑같다'며 전격 채용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왜 경영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까.

"1980년대에 윈도 같은 컴퓨터 OS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논문도 안 쓰고 수업도 대충 해가면서 그 개발에 몰두했지요. 당시 금성전자 삼성전자 현대전자에 상용화를 제안했는데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때 좌절이 너무 컸습니다. 그 후 경영대로 자리를 옮겼죠."

―대기업에서 상용화를 거절한 이유가 뭡니까.

"그때 대기업 간부들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미국 소프트웨어 회사 오라클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 데이터베이스는 전부 쓰레기 더미입니다. 절반은 도려내야 해요. 그런 데이터베이스에서 빅데이터를 뽑아낸다는 건 말도 안 되죠."

―빅데이터를 마케팅에 실제 응용하고 있잖습니까.

"빅데이터라는 게 미국 월마트 한 점포 관리부장이 발견한 것입니다. 1990년대 중반 한 월마트에서 수요일 저녁마다 기저귀와 맥주가 많이 팔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주말에 산 기저귀 한 팩이 수요일쯤 떨어져 가면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전화해서 '퇴근할 때 기저귀 좀 사 와' 그럽니다. 남편은 기저귀를 사러 월마트에 간 김에 맥주도 한 팩 사 가는 거죠. 그걸 깨달은 관리부장이 기저귀 옆에 맥주를 진열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기저귀와 맥주 매출이 무려 5배나 폭증했습니다. 이런 게 진짜 빅데이터입니다."

―우리 사회의 사고방식이 하드웨어 식에서 소프트웨어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요.

"일단 정부 아이디어가 모조리 하드웨어적입니다. 공인인증서와 아이핀으로 모든 보안을 하라는 게 대표적입니다. 국민이 불편하고 국제 경쟁력도 없습니다. 전에 IT 전문가 출신 정보통신부 장관이 '휴대폰 감청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정치권에서 살아남으려면 저런 거짓말도 해야 하나 보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 서울시 표어 '아이 서울 유'도 그래요. 세계 어느 도시나 랜드마크가 상징이지 런던이나 뉴욕에 표어가 어디 있어요. 길거리에 여당이고 야당이고 현수막 내거는데 유치해 죽겠어요. 우리가 그런 수준밖에 안 됩니까. 길에만 나가면 무법천지예요. 오토바이가 차도로 가고 인도로 가고 역주행하고 횡단보도로 가는 나라가 어딨습니까. 아프리카, 중남미를 가도 이렇게 무질서하지는 않아요. 이게 모두 겉모습만 중시하는 하드웨어적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소프트웨어 마인드 없이는 국가경영 안 돼

―대기업은 마인드가 조금 낫겠죠.

"삼성 스마트폰 OS가 뭡니까. 구글에서 제공하는 것 아닙니까. 구글이 돈 되니까 주지 삼성이 예뻐서 주나요? 컴퓨터나 휴대폰 본체의 OS를 삼성이 만들어야만 애플의 벽을 넘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 점유율이 0.8%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경쟁이 안 되죠."

―학생들에게 시험 대신 글쓰기를 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까.

"한 20년 전부터 제 강의에는 시험이 없습니다. 한 학기 동안 3페이지짜리 작문을 쓰게 하고 그걸로 평가합니다. 한 번에 한 문단씩 쓰게 해서 혹독하게 고치고 가르쳐서 학기말에 완성시키는 거죠. 요즘 대학가 시험 부정행위가 말도 못합니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고 신문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글쓰기예요."

그는 굵직한 해킹 사고가 날 때마다 국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해커들을 상대했다. 중남미와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제3세계를 다니면서 최신 IT 동향에 대해 가르쳐주는 봉사활동도 39세 때부터 매년 해오고 있다.

―컴퓨터 보안 전문가로서 해킹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주민등록번호를 생년월일로 하지 말고 신용카드나 여권 번호처럼 바꿀 수 있도록 하면 해킹 99%를 막을 수 있습니다. 아니 지난번 카드 3사 해킹됐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주민번호 변경 제도를 포함해서 대책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는데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왜 주민번호가 문제인가요.

"생년월일이 앞자리잖아요. 해커가 데이터베이스에 침투해 생년월일과 이름만 치면 주민번호 뒷자리가 줄줄 나옵니다. 요즘 주민번호 뒷자리 안 써도 되니까 좋아졌네 하던데, 좋아진 거 좋아하네. 이름과 생년월일만 알아내면 단칼에 정보를 찍어낸다니까요. 미국 사회보장번호는 외울 필요가 없을 만큼 쓰는 일이 적고, 영국은 주민번호 자체가 없어요."

―주민번호를 바꾸려면 비용이 많이 들지 않을까요.

"옛날 수작업하던 시대나 그렇지, 지금은 1000억원 미만으로 두 달이면 바꿉니다. 주민번호 정책 결정할 때 행정학자들이 관여하는데 비용을 계산 못 해요. 그러니까 몇조 원이 든다는 둥 엉뚱한 소리 하고 사회적 혼란이 예상된다는 탁상공론이나 하고 있죠."

그의 이름(松天)은 부친이 고향인 개성 송악산에 "소나무 천지더라"며 지어준 것이다. 테니스와 마라톤으로 체중 60㎏을 항상 유지한다는 그의 얼굴은 햇볕에 오랫동안 그을렸고 몸은 말랐으나 탄탄해 보였다. 소나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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