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뒤 라틴어·75살 때 중국어·81살 희랍어 '도전중'

입력 2015. 11. 2.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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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서울대 영어교육과 명예교수 언어학자 전상범 씨

언어학자 전상범 서울대 영어교육과 명예교수는 1996년 정년 이후에만 12권의 저서를 냈다. 이 가운데는 라틴어 학습 교재인 <라틴어 입문>(한국문화사 펴냄)도 있다. 퇴임 뒤 라틴어를 독학하던 참에 아예 교재까지 낸 것이다. 책을 쓰는 게 가장 좋은 배움법이라고 생각해서다. 막히는 대목은 라틴어 과목을 배운 적이 있는 외손녀가 도왔다. 7년 전 나왔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아 최근 개정판을 냈다.

올해 81살인 전 교수는 75살 때부터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지금은 “중국어 활용이 어느 정도 자유롭다”고 했다. 희랍어와 히브리어도 새로 배울 생각으로 강의 테이프와 교재를 사놓았다. ‘공부하는 노학자’를 지난달 28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내가 교수로 재직했을 때는 안식년 제도가 없었어요. 하고 싶은 공부가 많았지만 시간을 내기 힘들었죠. 정년 뒤부터는 매해가 안식년이라고 생각합니다.”

라틴어는 중세의 보편 언어였다. 언어학자로서 어찌 보면 당연히 배우고 싶은 언어다. “학생 때나 교수 시절에도 몇번이나 배우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번번이 20과 정도(모두 90과)에서 포기했죠. 꾸준히 공부하려고 책을 낼 생각을 했죠. 외손녀와 함께 6개월 걸려 썼습니다.”

외손녀 신성진씨는 현재 미국 미네소타대 영문학 박사과정 연구원이다. 연세대 영문과 대학원 시절, 미국 교환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전 교수의 권유로 라틴어 과목을 3학기 동안 수강했다.

‘한 권도 팔리지 않을 것’으로 걱정했다는 전 교수는 반응이 제법 있는 편이어서 스스로 놀라고 있단다. “누가 살까 했는데, 초판을 2쇄 찍었고 이번에 개정판까지 모두 1500부를 찍었습니다. 독학자가 써서 다른 책들보다는 조금 쉬운 편이어서 반응이 있는 것 같습니다.”

1996년 퇴임 이후에만 저서 12권 출간
2008년 손녀와 함께 라틴어 입문서도
‘쉬운 교재’ 소문나 최근 개정판까지

7개 외국어 능통 ‘공부하는 노학자’
부인 박희진씨 ‘공부 외조’해 교수로
“쉬운 말만 쓰면 언어도 나태해진다”

일반인들도 라틴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 “영어 어휘의 60%가 라틴어에서 왔죠. 라틴어를 알면 영어 습득이 더 쉽겠죠. 라틴어는 스페인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와 문법은 거의 같고 단어도 새로 배워야 하는 게 많지 않죠. 지금도 새 단어를 만드는 아카이브(창고)입니다. 컴퓨터, 바이러스, 비트 등이 모두 라틴어 어원입니다.” 컴퓨터만 해도 라틴어의 ‘com’(함께)과 ‘putare’(가늠하다)를 섞어 만들었다.

그는 실향민이자 국군 참전용사다. 고교 2학년 때인 1950년 아버지와 함께 월남해 군에 입대했다. 어머니, 동생 다섯과 생이별했다. 지금껏 생사조차 모른다. 해방 뒤 학교를 다니던 평양에서 5년 동안 러시아어를 배웠다. 군복무 4년을 마친 뒤 55년 서울대에 입학해서야 영어를 배웠다. 일본어는 80년대 신설된 경희대 일본어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을 정도로 능통하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활용에도 불편함이 없다.

“7개 외국어 가운데 교재를 낸 라틴어가 제일 미숙한 편이죠.” 외국어 학습이 여전히 즐겁다는 전 교수는 ‘텍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그 나라 말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독일어권 작가인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을 예로 들었다. “벌레가 된 주인공 ‘잠자’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 속 때문에 죽을 뻔하죠. 작가는 강자에게 당하는 약자의 이야기를 그리려 했겠지요. 이 작품의 독일어는 무척 평이합니다. 평범한 약자들이 썼을 법한 일상어입니다. 번역을 통해서는 이런 느낌이 오지 않아요. 원문을 읽으면, 이렇게 평이한 말을 쓰는 사람이 당하고 죽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오지요.”

그는 요즘 신약성서를 외국어로 필사하고 있다. “자꾸 잊어버려 중국어·일본어·프랑스어로 다 베꼈습니다. 독일어로는 거의 다 베껴 가고요. 라틴어로도 하려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손주 다섯에게 나눠줄 생각입니다.”

공부를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물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습니다. 보통 하루에 한 챕터씩 씁니다. 작업을 마친 뒤 프린터로 활자화해서 읽어 보면 뿌듯해요. 책이 나오면 이름을 적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합니다. 그럴 때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희열을 느낍니다.”

그는 내친김에 희랍어와 히브리어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신약은 희랍어, 구약은 히브리어로 씌어 있죠. 예수가 부활해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네가 날 사랑하느냐’고 묻지요. 희랍어를 보면 세번의 사랑이 다 다른 말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번역본은 한 단어이지요.”

전 교수에게 ‘한국어를 잘 지켜 나가는 길’에 대해 물었다. “언어는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영어권에서 라틴 어원인 ‘impenetrable’(뚫을 수 없는)이란 단어를 ‘ungothroughable’로 바꾸려 했지만 실패했죠. 자국어에 동의어가 많다는 것은 언어가 풍부하다는 걸 뜻합니다.” 그렇지만 자국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규제도 필요하다고 했다. “쉽다고 한자어를 그대로 쓰면 언어가 나태해집니다. 일본말 ‘시아게’를 우리말 ‘끝손질’로 바꾼 것처럼 새로 발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지요.”

전 교수의 부인 박희진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는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연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박 교수는 최근 펴낸 회고록 <그런데도 못다 한 말>(솔)에서 남편 전 교수를 ‘연필 깎아주는 남자’였다고 회상했다. 이화여고 교사 시절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하고 유학까지 다녀와 학자가 되기까지 남편의 강력한 권유와 외조가 있었던 것이다.

요즘 시력 약화로 공부 시간을 줄였다는 전 교수에게 하루 일과를 물었다. “오전엔 3~4시간 동안 저술과 번역을 하고, 오후에는 라틴어·중국어·프랑스어 등을 공부합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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