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물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100호 '옥장' 장주원 선생

2015. 10. 26.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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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단절된 전통 옥공예 복원한 '하늘이 내린 장인'.. 옥 종주국 中이 인정한 명장

[서울신문]‘하늘이 내린 장인(天工).’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 ‘옥장’ 장주원(79) 선생에 대한 찬사다. 5000년 옥공예 역사를 지닌 중국의 전문가들도 그가 만든 작품을 보면 “신기(神技)에 가깝다”며 혀를 내두른다.

중국 등 동양권에서 옥은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는 장신구였다. 장 선생은 지난 5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최고 권위의 ‘옥룡장’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해 ‘특급 명장’에 올랐다. 외국인이 최고 장인으로 선정된 것은 처음이다. 장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단절된 전통 옥공예를 복원하고 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국보급’ 장인으로 꼽힌다. 옥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 옥공예 전문가들도 그를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안간힘을 쓸 정도다. 중국의 대부호 등으로부터 ‘귀화’를 요청받기까지 했다.

장 선생이 옥을 만지는 기술 중에서 구슬 속에 또 다른 구슬을 빚어내는 ‘환옥 기법’은 3D, 4D 영상 기술로도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환주 기법’과 ‘고리연결 기법’, ‘회전 관통 기법’ 등도 신기에 가까운 독보적 기술로 알려졌다. 회전 관통 기법은 옥 원석에 5㎜가량의 좁은 구멍을 뚫고 내부를 파내 주전자와 연적 등을 만드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 곡면을 따라 수작업을 해야 하는 초정밀 기술이다.

지난 17일 전남 목포시 용해동 갓바위 공원 내 전통 옥공예 전시관에서 그를 만났다. 전시관에서는 중국의 옥 출토품 20여점과 그가 50여년간 손수 빚은 공예품 200여점이 살아 숨 쉬듯 빛을 발한다.

장 선생은 “5년만 더 살 수 있다면 꿈을 꼭 이루고 싶다”며 말문을 열었다. 꿈은 미완성 작품을 끝내고 전시관과 아카데미를 열어 전통 옥공예를 예술의 한 분야로 올려놓는 것이다.

미완성 작품 중의 하나는 올해로 24년째 작업 중인 ‘코리아 환타지’. 그는 당초 5년 완성을 목표로 작업에 돌입했으나 5배도 넘게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역사적 관점이 변하면서 수정을 거듭한 까닭”이라고 말했다. 코리아 환타지는 3t짜리 흑옥 원석에 단군시대~현대사에 이르는 상징적인 사실(史實)을 새기는 대작이다. 현재 60%가량 완성됐다. 그가 온 힘을 쏟는 작품이다. ‘9층 탑 벼루’에도 ‘송림칠현’을 재현하고 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죽림칠현’에서 착안했으며 단군왕검·을지문덕·세종·이순신 등 역사적 영웅들이 소나무 숲에서 담소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불교의 ‘오백나한도’와 ‘5대양6대주 향로’도 만들고 있다. 이 향로에는 6대주를 상징하는 용 6마리와 5대양을 나타내는 봉황 5마리가 새겨진다.

이미 완성된 대작을 보면 다보탑(흑옥), 미륵반가사유상(흑옥), 녹옥 봉황 연 향로, 황옥 용컵, 백옥 매화다기, 흑옥 해태 이중 연결고리, 청옥 원앙 삼사자 향로, 재스퍼 입식관통주전자, 백옥 봉래산 향로, 녹옥 사해태향로, 백옥 봉황 연향로 등이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손끝과 예술혼이 느껴진다.

그는 “지금은 작품을 디자인하는 데 예전처럼 시간을 쓰지 않는다”며 “옥 원석을 보고 주전자를 구상하면 떨어내야 할 부분이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하게 한다. 장 선생은 “옥 연마 과정에서 각각 5㎜와 7~8㎜를 파 들어갈 때 손끝에 느껴지는 온도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며 “50여년간 온몸에 밴 동물적 감각이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그의 옥공예에 대한 몰입은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로 갇혔던 아픈 과거도 있다. 40대 초반이던 1978년 겨울, 유달산 아래 작업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옥 지휘봉 제작을 의뢰받고 만드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다. 당시 가족들 앞에서 수석을 가리키며 “흑룡이 불을 뿜으며 하늘로 올라간다”고 얘기하거나 추운 겨울에 난방이 안 되는 작업실에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땀을 흘리며 작품을 구상하다가 오해를 샀다.

그는 목포에서 한의원을 하는 할아버지와 금세공에 종사한 아버지 덕택에 넉넉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광산 개발에 손을 댔다가 망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11명이나 되는 부양가족을 위해 20대 초반인 1959년 상경, 종로4가 금은세공장에서 일하면서 기초 기술을 익혔다. 28세 때인 1964년 종로2가의 보석 전문 공예사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옥을 다루게 됐다.

그는 옥에 매료된 이유에 대해 “당시 고리가 부서진 중국산 옥 향로 제품의 수리를 의뢰받았는데 어떻게 고쳐야 할지 막막했다”며 “그때 옥공예를 해 보겠다고 맘먹었고 그 후 2주간 접신한 무당처럼 밥도 못 먹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등 신열에 시달렸다”고 회상했다. 옥공예에 흠뻑 빠져든 것이다.

목포와 서울을 오가며 옥 기술 연마에 정진했다.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는 옥 표면의 균열을 열처리해 강도를 높이는 기술 등도 그의 독창적 아이디어다. 이런 노력으로 탄생한 작품의 예술성이 입소문을 타면서 1984년 한 언론사의 초대전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공예품이 공개되자 언론매체나 문화계 인사들은 “하늘이 내린 장인”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1987년 전남도 무형문화재, 1996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제 ‘옥장’으로 지정됐다. 미국 텍사스 힐우드 뮤지엄 초대전, 중국 베이징 공예박물관 초대전, 프랑스 베르사유 박람회 전시 등이 잇따랐다.

그는 중국 관광객이 몰리는 제주도에 상설 전시관 개관도 구상하고 있다. 또 비취옥 등이 많이 생산되는 미얀마에 옥공예 학교를 개설한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인구가 각각 10억명이 넘는 중국과 인도 시장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나이가 79세인데도 말이다.

장 선생은 “대량생산되는 중국 옥공예품의 품질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며 “감성을 불어넣는 수공예로 종주국인 중국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모리 미술관이나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에서 한국 옥공예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게 마지막 꿈이다.

글 사진 목포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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