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흑인·베트남 학생 의사로 키우고 싶어요"
22년째 유색인종 대상 무료 수학교실 이길식 UTD 교수
(갈랜드<미국 텍사스주>=연합뉴스) 장현구 특파원 = 미국 텍사스 주 북부의 중심 도시 댈러스 인근 갈랜드 시에 있는 베트남 공동체 센터는 매주 토요일 오전이면 '학문의 전당'으로 바뀐다.
17일(현지시간) 오전 10시 무렵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공동체 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출석부에 이름을 적고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교재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어느덧 베트남 공동체 센터에 마련된 60개 좌석은 빼곡히 찼다.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다양한 학년의 베트남·흑인 학생들은 자리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열심히 수학 문제를 푼다.
이길식(62) 댈러스 텍사스대학(UTD) 전기공학과 교수가 만든 '인텔리초이스'(intellichoice) 무료 수학 교실을 찾는 학생은 거의 가난한 가정 출신이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사교육 열풍이 거센 편인 미국에서 학원에 다닐 수 없는 학생들은 이 교실을 찾아 부족한 실력을 메운다.
대구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이 교수는 경북대를 졸업하고 1981년 미국으로 건너와 1987년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루이지애나 주립대를 거쳐 2001년 UTD로 옮겼다.
이 교수는 UTD 수학과 교수인 아내 이정순(59)씨와 루이지애나 주에 있던 1993년부터 수학 교실을 시작했다.
2년 전부터 학생들에게 장학금 2만 달러를 준 이 교수는 다음달에도 학생 50명에게 500달러씩 2만5천 달러를 줄 참이다.
이 교수는 안식년인 1991년, 워싱턴D.C.에서 머물면서 많은 흑인이 정처 없이 노니는 것을 보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고 했다.
가족 중 유일하게 고교(대구고)와 대학을 나온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가난 때문에 담임 선생님 집에 의탁해 지냈다.
그는 "가난해서 학교에 가지 않고 노는 흑인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전공을 살려 수학 교실을 열었다"고 회고했다.
흑인 거주 지역은 대부분 열악하고 위험했다. UTD로 옮기고 나서 2001년 댈러스에서도 가장 치안이 좋지 않은 남부 지역에 첫 교실을 열고 이 교수는 재능을 기부하기 시작했다.
소문을 타고 공짜 수강생과 이들을 도우려는 자원봉사자가 몰렸다. 매주 화요일 또는 토요일에 여는 수학교실은 댈러스 인근 도시로 퍼져 나가 7곳으로 늘었다.
빈곤층 학생의 학력 신장을 위한 이 교수의 무료 수학 교실이 지역 사회의 뜨거운 호응을 얻으면서 애리조나 주의 한국인 선교사들도 관심을 표명했다.
인텔리초이스 수학교실은 애리조나로 '수출'돼 다음달이면 2∼4곳이 생길 예정이다. 노던 애리조나주립대 학생들이 자원봉사자의 주축을 이뤄 나바호 인디언 후손들을 가르친다.
연필과 지우개, 교재 등은 모두 이 교수 측이 준비한다. 학생들은 몸만 와서 자율적으로 문제를 풀고, 봉사자들이 돌아다니며 막힌 부분을 이들에게 설명해준다.
이 교수는 "이곳의 베트남 동포 회장이 수학 교실을 1∼2개 더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면서 "다른 6곳도 대기 학생이 넘칠 만큼 반응이 좋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원봉사자를 더 모집하고자 학교 자원봉사 모집 부서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 교수의 뜻을 돕고자 김진오 텍사스 A&M 대학 컴퓨터공학과 교수, 인도 출신의 고팔 굽타 UTD 컴퓨터공학과 학과장 등이 기꺼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특허 전문 회사에서 일하는 김경동(42)씨는 인터넷에서 이 교실을 보고 스스로 봉사를 하러 찾아왔다.
어릴 적 캐나다에 이민 와 구세군 관련 봉사활동을 했다던 그는 "가르치는 건 처음이지만, 수줍어하는 학생들을 보니 재미있다"면서 "평소 수학을 즐기는 편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차분하게 돕는 중"이라고 했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아동 관련 직종 취직을 앞둔 실리 정은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흥미롭고 이들의 수학 실력이 나날이 느는 것을 보니 보람 있다"고 답했다.
텍사스 지역 명문인 오스틴 텍사스대학에 진학한 언니를 보고 이 교실에서 3년째 수강 중인 흑인 소녀 사바는 "이 교실을 통해 수학 실력이 나아졌다"면서 "열심히 공부해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일일이 관리할 수 없기에 저소득층 아이들은 낙오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학은 단계별 과목으로, 곱하기를 못하면 절대 나누기를 할 수 없어요. 이런 빈곤층 학생들이 중·고교를 졸업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약을 거래하든지 그러겠지요. 그들의 어려움을 보면서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이들이 빠르게 성공할 수 있도록 의사로 키우고 싶어요."
정형외과 의사인 장남을 비롯해 세 자녀를 보란 듯이 키운 이 교수의 또 다른 '아메리칸드림'이다.
cany99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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