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부정하며 사는 것.. 그게 나의 시적 태도"

황수현 2015. 10. 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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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시인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 출간

2012년 첫 시집으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가 된 황인찬 시인이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를 펴 냈다. 민음사 제공

종말은 인간을 철학자로 만든다. 모두가 장작불을 땔 땐 그저 열심히 나무만 패다가도, 보일러가 발명되고 나면 비로소 장작 패는 행위가 심신 발달에 기여한 바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증발하는 시의 효용가치는 시인들을 철학자로 만든다. ‘무엇을 쓸까’ 보다 ‘왜 쓸까’란 질문이 더 무거워진 상황에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은 ‘왜’를 그 자체로 ‘무엇’으로 만들어버렸다. 황인찬 시인은 그 중 가장 극단적인 한 명이다. 2012년에 낸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가 된 그가 두 번째로 펴낸 ‘희지의 세계’는 시의 열매를 대중에게 물어다 주는 것보다 시의 존재 이유를 캐물으며 시를 “괴롭히는” 데 집중한다.

“왜 아직도 시가 있고 이토록 많은 시집이 나올까요? 사람들이 흔히 ‘시적’이라고 여기는 건 더 이상 시라고 할 수 없죠. 그렇다고 전후 시대처럼 아방가르드하고 전위적인 시가 나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에요. 지금 이 시대에 시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묻고 싶어요.”

이달 초 합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시인은 이 질문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기존 시들이 쌓아 올린 역사에 안주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싹 쓸어버리지도 못한 채 고민하는 과정은 그대로 시 속에 박제됐다.

“해 질 녘 복도를 홀로 걸어가던 어린 날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잠들기 전 올려다 본 천장의 어둠 너머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 다섯 살 난 조카가 다가와 인생의 비밀을 털어 놓을 때는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만이 전해져 오고, 알겠다며 같이 놀라는 시늉을 해야만 한다//그 모든 것이 세계의 깊숙한 곳과 연결된 것처럼 혹은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처럼” (‘이것이 시라고 생각된다면’ 중)

인생의 비밀이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시인은 똑바로 말하라고 화내거나 들은 셈 치고 다음 얘기로 넘어가는 대신 같이 놀라는 시늉을 해준다. 인생의 비밀 혹은 진짜 시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어린애 대하듯 하지만 거기엔 연민도 경멸도 없다. 그저 상냥한 회의다. “(사람들이) 시의 역할을 착각하는 것이 좋으면서도, 그것이 착각이라는 건 계속 의식하되, 그래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착각을 하고 싶은 거예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를 찾는 그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거인의 어깨 위가 아닌 땅바닥에서 이뤄진다. 열악한 조망에 답답할 순 있겠지만 진짜 흙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자리다. 시인은 거기서 흙탑을 쌓아 올리지 않는다. 시는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쌓아 올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평생 나를 부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게 제가 갖고 싶은 ‘시적 태도’입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mailto: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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