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출판명가 '현암사' 이끄는 3대 조미현 대표

입력 2015. 9. 2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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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성실이 현암의 힘..소임 마치면 누구든 적임자에게 물려줄 것" 11월초 파주서 70년 역사 돌아보는 전시회 개최
현암사(한황수씨) 제공
현암사(한황수씨) 제공

"신의·성실이 현암의 힘…소임 마치면 누구든 적임자에게 물려줄 것"

11월초 파주서 70년 역사 돌아보는 전시회 개최

(서울=연합뉴스) 김중배 기자 = 을유문화사와 함께 올해로 창립 70주년을 맞은 현암사는 국내에서 가장 유서 깊은 출판사 가운데 하나다.

출판인들은 현암사가 격동의 현대사와 출판산업의 부침에도 흔들리지 않고 현재의 입지를 지켜올 수 있었던 배경으로 창업자인 고(故) 조상원 회장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사람 존중과 상생의 경영, 그리고 그 실천을 꼽는다.

조부와 부친 고(故) 조근태 전 대표에 이어 지난 2009년부터 3대째 회사를 이끌어온 조미현(44) 대표는 현재의 현암사를 이끌어가는 주역이다.

최근 마포 사옥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응한 조 대표는 "현암사 70년을 이끈 힘은 '신의와 성실'"이라며 "사람이 제일이며, 현암사의 주인은 직원이라는 선대의 철학을 지키는 것을 경영의 우선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현암사는 타 산업에 비해 자본규모가 크지 않은 출판업계 내에서도 중간 규모에 속하는 출판사다. 법전 전문 출판사로서의 입지와 더불어 황석영의 '장길산', 최순우의 '한국미술 5천년'을 비롯해 1990년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꽃 100가지' 등 시리즈를 내놓으며 한국학 부문에서도 고유의 성과를 내온 출판사로 자리매김해왔다.

선대 경영진의 상생 실천은 실제로 고비마다 현암사를 지킬 수 있는 버팀목이 돼왔다.

"현암사 어음은 은행보다 신용이 있었다고 해요. 선친들은 어음 결제일과 직원 월급 일을 단 하루도 미룬 적이 없었죠. 30년 넘게 일한 관리 직원이 한 번은 이자 부담이 크니 급여 지급을 하루만 미루자고 했다가 아버님께 불벼락을 맞았어요. 그래서 대출을 받아 직원 월급을 지급할 수밖에 없었죠."

출판가엔 '어음을 바닥에 깔아야 협력사들이 제대로 일을 한다'는 말이 있다. 이름만 대면 알 출판사조차 협력사에 지급해야 할 대금을 떼먹었다는 말이 풍문으로 떠도는 현실이다.

선대가 지켜온 철칙이 큰 대가로 돌아온 지난 2010년 말의 경험을 조 대표는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일요일이었죠. 교회에 갔다가 운동을 하러 가는데 거래하던 지업사 사장님으로부터 10시 반쯤 전화가 와서 급히 만나자는 거예요. 왠지 느낌이 이상했어요. 쉽지 않은 시기여서 이런저런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죠. 11시 다돼서 약속장소에 도착한 사장님이 품에서 어음결제 봉투를 꺼내시더라고요. 덜컥 겁이 나는데 사장님이 '제가 부도를 내게 됐어요. 현암과 20년 넘게 거래해왔는데 현암만큼은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통상 선지급해온 법전에 쓰일 종이 대금 2억원 가량의 어음이었다. 떼였다면? 조 대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옥 신축 등으로 인해 정말 어려운 시기였어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졌겠죠."

현암사는 현재 그 지업사 사장의 조카가 운영하는 일문지업사와 거래를 잇고 있다.

1년이 멀다고 직원을 내치거나, 그만두는 경우가 즐비한 출판계 실정과 비교할 때 현암사는 '섬'과 같다.

40년간 재직한 직원이 한 명, 30년과 20년을 넘긴 직원들이 각각 두 명에 이르며, 23명 가운데 반수 이상 직원들의 근속연수가 10년을 넘는다.

김현림(52) 편집주간은 1990년에 입사해 14년가량 근무하다가 회사를 떠났다가 지난해 조 대표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복귀한 경우다.

김 주간은 현암사로 돌아온 이유를 묻는 말에 "선대 경영진들을 보면서 정말 책을 만드는 분들이란 생각을 했다"며 "출판의 본령에서 벗어나지 않고 본분을 지키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술을 전공한 조 대표는 유학길에 올랐다가 1998년 부친의 뜻을 못 이겨 현암사에 입사한 뒤 영업직부터 시작해 출판인의 길을 걸었다.

2009년 이후 본격적인 경영자의 길을 밟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10년 3월 부친과의 사별, 사옥 신축 과정에서 겪은 우여곡절은 감내하기 쉽지 않은 시련이었다.

부담을 갖고 사옥 신축에 나섰지만, 2011년 초 시공업체가 부도를 내면서 결정적 위기를 맞는다.

조 대표는 이후 출판인이 아닌 공사현장 '관리자'의 거친 일을 도맡아야 했다. 당장 받을 노임을 떼이게 된 인부들을 설득해 공사를 계속하도록 하는 일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어렵사리 공사를 재개했으나 예산 외로 지출된 비용을 감당하는 게 문제였다. 조 대표는 자재 구입 등에서 일일이 발품을 팔아 비용을 아꼈다. 출판사보다 공사현장으로 출근하는 일이 잦았고, 회식에도 참여하며 현장 인부들과 '스킨십'을 쌓아나갔다. 그렇게 공정 하나하나를 챙기다 보니 사옥에 쓰인 자재 하나하나의 가격을 여전히 외우고 있을 정도다.

"2011년 6월 사옥으로 이전할 당시 저자 선생님들이 오랜만에 저를 보곤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부친인 조근태 전 대표가 경영권을 물려받는 시기 또한 조 대표와 비슷했다. 철학을 전공하고 연극을 하고 싶었던 부친과 성향 또한 닮은꼴이다.

"부친은 경영권을 넘겨주시고 나선 일절 관여하지 않으려 했어요. 도저히 결정할 수 없어서 결재 서류를 들고 들어갔다가 퇴짜 맞고 나올 수밖에 없었죠. "

조 대표는 3대가 같이 살던 어린 시절 조부를 향해 숟가락을 던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청빈함과 근면을 강조한 엄한 가풍을 참을 수 없을 때도 적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신을 지탱하는 '힘'으로 내면화했다.

그가 경영을 맡기 전 전 공동대표와 부친 사이에 촉발된 갈등과 이후 빚어진 법적 분쟁은 그에겐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아픔의 상처로 남아 있다. 조 대표는 "제가 출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많은 것을 배웠던 분"이라며 "소송으로 치달은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적어도 그의 내면에서는 분쟁의 아픔을 이겨내고 대승적으로 승화한 것으로 보인다.

조 대표는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소임을 다하겠다"며 "현암사의 가치를 잘 알고 키워나갈 사람이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경영권 승계에 대해 열어놓고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부에 관심이 많다. 10분의 1 기부통장을 만들었고, 수목원과 북한 어린이 돕기, 노숙자 지원, 비행청소년들을 선도하는 교수에 대한 지원 등 기회 될 때마다 기부 적립을 해나가고 있다.

조 대표는 "중용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저의 화두"라며 "옛날에는 도자기가 부러웠지만, 이제는 질그릇이라고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현암사는 오는 11월 파주에서 창립 70주년 기념 '현암사 70년 책을 말하다'(가칭) 전시회를 개최한다.

전시회는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겨', 이어령 선생의 '흙속의 저바람 속에'를 비롯, 현암사가 내놓은 옛 간행물 전시 등으로 꾸려진다.

1952년 간행한 조상원 편 '걸작소설선집' 등은 국립중앙도서관에만 1부가 소장돼 있어 현암사가 도서관 측과 대출 전시를 협의 중이다.

jb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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