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한 계단, 한 계단씩 38년.. '미세스 캅' 신화를 쓰다

장일현 기자 2015. 9. 19.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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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현 기자의 인&아웃] 고졸 출신 순경에서 치안정감까지.. '女警의 전설' 이금형 세 딸 엄마의 마음으로.. 수사할 땐 感天할 정도로 최선 다해 청주에서 순경 생활 시작 마포 발바리 검거·도가니 사건 해결.. 경찰청장 빼고 모든 계급 다 거쳐 여성·청소년 대상 성폭력·가정폭력 경찰 수사에서 우선순위 끌어올려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발령받아 갔더니 그곳에서 그러데요. '가장 남자다운' 경찰이 왔다고…. 하긴 불도저처럼 일하긴 했죠."

이금형(57) 전 부산지방경찰청장은 우리 경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쓴 인물이다. 고졸 순경으로 출발해 경찰 내 서열 2위인 치안정감까지 올랐다. 그가 경찰 경력을 시작한 약 40년 전 경찰은 이 땅에서 군대와 더불어 가장 남성적인 조직 중 하나였다. 그런 조직에 뛰어들어 악전고투한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드라마 중에서도 핵심은 경찰 업무에 대한 통념을 바꿔놓았다는 점이다. 그가 막 경력을 시작했던 시기의 경찰은 강력범 잡는 것이 업무의 전부였다. 이금형은 그때까지 경찰에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성폭력·여성·청소년 분야를 개척했다. 그는 "한때 여경조차 꺼렸던 여성·청소년 분야가 요즘엔 승진 코스가 됐다"며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고 했다.

이금형은 1977년 고졸 출신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해 여경(女警) 역사상 세 번째 총경이 됐고, 두 번째 경무관이 됐다. 여경으로서 치안감·치안정감까지 오른 기록은 지금까지 그가 유일하다. '순경→경장→경사→경위→경감→경정→총경→경무관→치안감→치안정감', 경찰청장(치안총감) 빼고 모든 계급을 다 거친 경력도 그만이 갖고 있는 기록이다. 그는 마포경찰서장(총경) 때 연쇄성폭행범 '마포 발바리' 검거, 광주지방경찰청장(치안감) 시절 '도가니' 사건을 해결해 주목을 받았다.

작년 말 부산청장을 끝으로 경찰을 떠난 그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최근 책 한 권을 들고 나타났다. 경찰에서 은퇴한 후 조용히 경찰인생 38년을 담은 책 '공부하는 엄마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알에이치코리아)'를 썼다고 했다. 일하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고, 그런 노력이 직장과 육아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인생 이야기에 버무린 내용이다.

그는 요즘 지방의 한 대학에서 강의하고, 학교·가정 폭력 예방과 여성인권 관련 특강을 하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학교 폭력 예방 사회단체 '청예단'의 한 지부에서 그를 만났다.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소름이 끼쳤다"

그는 고향인 충북 청주에서 순경 생활을 시작했고 1982년 경찰청으로 와서 이후 약 17년 동안 과학수사과에서 일했다. 2001년 1월 경찰청의 초대 여성실장이 됐다. 각종 여성·청소년 대상 강력범죄들이 크게 늘고, 그에 대응하는 법들이 잇따라 만들어지면서 경찰도 관련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여성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금형은 "그땐 도대체 나보고 뭘 하라는 거야, 내가 왜 가야 하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고 했다. 그해 5월 어느 날 그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분노에 찬 한 산부인과 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를 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이는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 승합차에 탄 낯선 아저씨 2명이 길을 묻기에 잠깐 차에 올랐다가 야산에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심하게 피를 흘렸다.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병원 4곳을 전전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 딸이, 내 품에서 죽어요"라고 절규했다.

몇 시간을 헤맨 끝에 서울 구로에 성폭행 피해자를 돌보는 산부인과를 찾았고, 의사 3명이 4시간 동안 수술에 매달린 끝에 아이는 기적처럼 살았다. 범인들은 10여 일 만에 검거됐다. 출소한 지 6개월도 안 돼 40여 건의 연쇄성폭행을 저지른 흉악범들이었다.

딸 셋의 엄마이기도 한 이금형은 "그 사건이 내 인생의 물줄기를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돌려놨다"고 했다. "앞으로 어디서 어떤 일을 할지 모르지만 경찰에 있는 동안 아동과 여성 문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땐 이미 25년 차 베테랑 경찰이었다. 비슷한 사건, 사고는 수도 없이 봤을 텐데 그 사건의 어떤 점이 달랐나.

"과학수사과에 근무하면서 화성연쇄살인사건 현장에 나가 지문 채취·감식을 하는 등 전국의 떠들썩한 강력사건들을 숱하게 접했다. 하지만 그땐 그저 사건이었고, 해결해야 할 일에 불과했다. 여성실장이 된 후 아동·청소년 문제에 막 눈뜨기 시작하는데 그 무렵 사건이 터졌다. '나와 내 가족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소름이 끼쳤다. 그때부터 아동·여성 성폭력 사건을 다른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다."

―경찰에선 여성·아동 분야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단 뜻인가.

"2000년대 초반까지도 여성이나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 폭력 등은 경찰 업무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남녀 간 문제, 자라나는 학생들의 성장통, 가정 교육상의 문제 정도로 취급됐다. 그런 생각을 바꿔야 하니 여기저기 다니며 크게 떠들어야 했다. 성대결절이 걸리고 '이핏대'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찰은 성폭력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우선순위 문제도 있었다. 형사 인사고과엔 사건을 해결하면 받는 점수가 있다. 절도 1점, 강도 3점, 살인 5점이었다. 성폭행은 절도와 똑같이 1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현실이 그랬다. 당신이 경찰이라면 어떤 사건을 먼저 해결하겠나. 아동·성폭력 문제 등은 경찰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이 있는데다 인사에서도 평가를 못 받으니 경찰이 우선적으로 달려들질 않는 거다. 그래서 수사국에 열심히 드나들며 성폭력 해결점수를 3점으로 올려놨다."

―그 이후엔 형사들이 성폭력 사건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던가.

"진천경찰서장 마치고 2004년 경찰청 여성청소년과장으로 와보니 어찌 된 일인지 다시 1점이 돼 있더라. 난리를 쳐서 다시 3점으로 만들어놨다. 혜진이 예슬이 사건 등이 터지고 성폭력 사건은 5점이 됐다."

‘불도저’라 불리는 여경

사람들은 그를 ‘불도저’ ‘철녀’라고 했다. 일이 생기면 낮밤을 가리지 않았고 휴일도 없었다. 그는 “할 일이 눈앞에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았다. 또 문제는 꼭 해결해야 하는 성미였다”고 했다.

―여경 후배들을 생각해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감도 컸을 것 같다. 어떤 심정으로 일했나.

“난 무조건 최선을 다했다. 그게 철칙이다. 사건은 해결 못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감천(感天)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줄 수 있는 거다.”

―어디에서 그런 추진력과 힘이 나오나.

“자식 키우는 여성, 엄마의 마음이 원동력인 것 같다. 강력한 힘은 거기에서 나온다. 사건 피해자의 90% 이상이 여성·아동·청소년·노인·장애인이다. 피해자의 아픔을 엄마의 마음은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낸시 펠로시 전 미국 연방 하원의장이 ‘사회의 모든 역할은 엄마 역할의 확장이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일을 벌였다. 과학수사계장 땐 공공근로 700명을 동원해 17세 이상 3000만명의 지문을 전산화했다. 이 자료가 수사에 활용돼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를 하루 만에 검거할 수 있었다. 여성실장 시절엔 경찰병원에 성폭력 피해자 지원 원스톱지원센터를 만들었다. 여경이 24시간 병원에 상주하며 피해자 응급진료·증거채취·최초 진술 등을 돕는 제도다. 이 센터는 작년 말 전국 종합병원에 20여 개로 늘었다. 이 독특한 제도를 보려고 외국에서 견학을 오기도 한다.

―일 많이 벌이는 상관으로 소문나면 직원들에게 인기 없을 텐데···.

“2010년 경찰청 교통관리관(경무관)으로 발령이 났는데 전국 교통 경찰 사이에 ‘우린 다 죽었다’란 말이 돌았다. 교통사망사고 절반 줄이기 프로젝트를 밀어붙였고 실제 사망자를 크게 줄였다. 경찰청 내에선 ‘이금형 일 못 하게 하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일만큼은 철두철미하게 해냈다. 그러면 일도 사건도 꼭 풀렸다. 2006년 마포경찰서장 때 발바리 사건이 그랬다.”

―1년 반 가까이 10명 넘는 성폭력 피해자가 발생해 여성들이 공포에 떨었던 사건이었는데.

“잡고 보니 피해자가 30여 명이나 됐다. 전임 서장이 ‘열심히 하는 스타일인 거 아는데 내가 할 거 다 해봤다. 안 되는 사건 갖고 직원들 고생시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부임하는 날 업무추진비 들고 수사본부 가서 ‘꼭 잡자’고 했다. ‘더 이상 할 게 없다’길래 범인 몽타주 그려서 관내에 도배를 하라고 했다. 또 피해자를 처음부터 다시 만나보라 했다. 나도 피해자를 다 만났다.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단서가 나온다.”

―당시 범인 검거를 자신할 만한 어떤 이유라도 있었나.

“그건 아니다. 여성실장이 된 후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성폭행 사건이 일어나면, 그 범인이 잡힐 때까지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추가 피해를 막는 게 급했다. 몽타주를 쫙 뿌리면 범죄심리가 억제된다. 도둑이 제발 저린 심리를 이용하는 거다. 나중에 검거된 범인에게 ‘몽타주 봤냐. 닮았냐’고 물었더니 정말 자기랑 닮았다고 하더라. 범인은 피해자에게서 뺏은 50만원짜리 수표로 신발을 샀는데, 그 수표를 형사 탐문으로 확보해 붙잡았다. 서장 부임 두 달쯤 됐을 때였다.”

“설친다는 소리 참 많이 들었다”

그는 경찰서장 시절 무전기를 끼고 살았다. 퇴근할 때도 갖고 나갔고 잘 땐 침대 밑에 놔뒀다. 자정 넘어, 새벽에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무전 때문에 남편이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부산청장 때는 “첫째도 보고, 둘째도 보고, 마지막도 보고다. 밤에 ‘주무실까봐’ ‘피곤하실 텐데’라며 보고 안 하면 알아서 하라”고 공언했다.

―무전기를 집까지 가져가는 게 일반적이진 않은 것 같다.

“무전은 경찰의 혈관이다. 진천과 마포에서 서장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무전기 때문이다. 한번은 진천에서 오후 11시쯤 순찰 직원들이 ‘막걸리 한 잔 하자’고 말하는 무전을 들었다. 다음 날 밤 비슷한 시각에 ‘밤늦게 고생 많습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라고 무전을 날렸다. 서장이 그 시간에 무전을 듣고 있다는 걸 모든 직원이 알게 됐다.”

―지휘관이 모든 일을 시시콜콜 알아야 하나.

“중요 사건은 타이밍 놓치는 게 최악이다. 절대 용납 못 한다고 했다. 서장이, 또 청장이 상황을 알면 자원과 인력을 효율적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지휘관이 알고 모르고, 현장에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2013년 초 부산에서 현금 수송차량 탈취 사건이 발생했다. 이금형 부산청장은 새벽 4시쯤 현장에 도착, 경찰력을 총동원했다. 범인은 다음 날 잡혔다.

―해결하지 못 한 사건도 있나.

“그럴 뻔한 일이 있었다. 작년 부산 가야동 고부살인사건이었다. 두 달 넘도록 용의자도 특정하지 못했다. 수사본부 팀장들을 불러 필요한 게 없는지 물었더니 CCTV 보는 모니터가 너무 작아(10인치) 내용 확인이 안 된다고 했다. 당장 30인치 대형 모니터를 3개 사줬다. 그 화면에서 아주 작은 용의자 차량을 발견했고, 결국 범인을 잡았다. 청장의 관심과 지원이 그만큼 중요한 거다.”

고졸에 순경 출신, 그것도 여경이 승승장구하자 근거 없는 비난과 질투도 이어졌다. 승진 시험 스터디에 끼어달라고 했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다.

―경찰 조직은 군대같은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다. 잘나가는 여성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을 텐데.

“‘설친다’ ‘튀려고 한다’ ‘승진에 눈멀었다’는 뒷담화는 한도 끝도 없었다. 일은 힘들지 않았다. 그런 편견, 차별이 쇠고랑만큼 무거웠다. 경찰청 과장 때 결재 서류를 만들어 올렸는데 상관이 ‘넌 내가 우습냐’고 하더라.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과장 결재 칸이 자기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이었다. 자리에 돌아와 자로 재보니 칸 크기는 똑같았다.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왜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받을까 고민도 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더 무섭지 않았나.

“여성·청소년 업무는 을도 그런 을이 없었다. 온갖 부서에 아쉬운 소리 해야 한다. 인사 때 희망 부서로 기획·인사·정보·감찰이라고 아무리 써도 꼭 맨 나중에 쓴 여성·청소년 분야로 갔다. 여성·청소년과장을 두 번 했다. 광주청장을 마치고 경찰청에 돌아왔더니 또 여성·청소년 업무를 관할하는 생활안전국장 하라고 하더라. ‘중요한 자리인데 누가 하겠느냐’며…. 그렇게 중요한 자리면 남자들도 좀 보내라고 주장했다. 항의하고 읍소해서 경무국장을 했다. 나도 이런데 중간급 이하 여경들은 오죽할까 싶더라. 그래서 더욱 경무국장을 고집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다른 부서나 상관을 설득하고 지원을 이끌어내야 했을 텐데.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상사에게 자판기 커피 빼다 주고, 초콜릿 사주고, 밥도 같이 먹었다. ‘옷 멋지다’ ‘왠지 오늘 잘생겨 보인다’는 아부성 발언도 했다. 소주폭탄주 대결도 마다하지 않았다.”

―술을 잘 마시는 모양이다.

“서른일곱 살 경감이 될 때까지 술 한 방울 입에 댄 적도 없다. 직원을 다룰려면 술을 마셔야 했다. 생계형 음주였다. 남편과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나만 지방간이라고 해서 쑥스러웠던 적이 있다. 소폭은 경정 때까지 한 번에 10잔, 총경·경무관 때 7잔, 치안정감 때 5잔 정도 마셨다.”

이금형은 청주 순경 시절 전경으로 복무하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나중에 삼성그룹 계열사에 취직했다.

“여경도 승진을 하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암에 걸렸고 하던 사업도 기울었다. 5남 1녀 중 셋째인 이금형은 “앞으론 여경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아버지와 삼촌 말을 듣고 경찰에 지원했다. 그림을 좋아했고 잘 그렸지만 화가의 꿈은 접기로 했다. 투병 끝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최종 면접 보는 날 아버지 장례식이 있었다. 면접 끝나고 돌아오니 아버지의 빨간 황토 봉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경찰이 됐을 때인 77년만 해도 전국 여경은 다 합해봐야 50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전국 경찰(4만6000여 명)의 1% 정도다. 여경 중 제일 높은 사람은 경감이었다. 이금형은 “그분을 경찰청 와서 처음 봤을 때는 ‘여경도 저런 거(경감) 할 수 있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과학수사과 남자 선배가 “여경도 공부해야 한다”길래 두 달 공부해서 경장 시험에 합격했다. 이금형은 경장부터 경정 때까지 다섯 번의 시험을 모두 한 번에 통과했다. 거의 ‘시험의 신’ 수준이었다.

―경찰은 주로 범인 잡아서 승진하는 것 아닌가.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시험 쳐서 승진할 수 있다는 걸 서울 와서 처음 알았다.”

―범인 잡느라 바쁠 텐데 언제 시간이 나서 공부하나.

“책은 늘 수면제였다. 책엔 늘 커피와 침이 묻어 있었다. 경위 되고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다녔다. 한 교수가 ‘졸리고 힘들더라도 듣고 또 들으세요’라고 했다. 강의 내용을 녹음테이프로 듣던 시절이다. 그때 녹음기 공부법을 체득했다. 문답과 해설을 녹음해 아침 기상 때와 잠자기 전은 물론, 세수하고 화장하고 설거지하고 다림질할 때 들었다. 그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하루 24시간을 28시간처럼 썼다. 녹음기가 5대 고장 났고, 이명증(耳鳴症)을 두 번 앓았다.”

그는 방통대를 졸업한 뒤, 석사·박사 학위도 땄다.

―경찰 내에서 여경들이 일하고 승진하는 건 남성 경찰에 비해 어렵지 않나.

“경찰은 선진적이고 개방된 조직이다. 승진자 중 절반을 시험으로 뽑았다. 여경에겐 기회다. 내가 경감·경정 시험에 합격한 뒤, 여경들이 시험에 도전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는 “순경이 된다는 건 100m 달리기 할 때 30m쯤 뒤에서 뛰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며 “총경을 경찰의 꽃이라고 하지만 순경이야말로 진짜 경찰의 꽃”이라고 했다. 순경이었기에 경찰 업무를 밑바닥부터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지만, 아이 낳아 키우면서 일도 잘해내기란 정말 어려운 것 아닌가.

“결혼하고 시부모, 시누이 4명과 함께 살았다. 둘째를 낳으니 가족이 모두 10명이 됐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거다. 한국에선 여성이 인정받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다른 한 여성의 희생이 깔려 있다고 한다. 자녀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친정과 시댁, 친·인척 도움을 잘 활용해야 한다.”

―그만둘 뻔한 고비는 없었나.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가 30대 중반까지이다. 결혼하고 애 낳고 봉급은 아직 적은 때다. 버텨야 한다. 애 키우고 살림하는데만 정신 팔지 말고 자기를 개발하면서…. 여성 인생에는 사이클이 있다. 그 축적이 30대 후반 이후에 치고 올라가는 추진력이 된다.”

―올해 여경이 1만명을 넘었다. 전체 경찰의 10%가 됐다. 그들에게 던지고 싶은 화두는.

“나는 경찰로 38년, 총 1만3870일을 일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순경 때 열심히 일해서 경장이 됐고, 또 열심히 살아서 경사가 됐다. 그렇게 바로 앞을 봤다. 그런 하루가 38년이 됐고, 치안정감을 만들었다. 오늘은 죽어가는 사람이 그토록 바라는 내일이라고 하지 않나. 열심히 산 하루야말로 정말 강력한 거다.”

그에게 치안정감이 됐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다. “순경 출신과 여경도 치안정감이 될 수 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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