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중에도 성악 레슨 받아.. 타고난 천재 부럽지 않다"

2015. 8. 22.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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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 인생]뮤지컬 배우 박은태
[동아일보]
1년 365일을 보름씩 쪼개 24개의 이름을 붙인 24절기는 농사짓기에 매우 유용하다. 24절기에 맞춰 씨를 뿌리거나 모내기를 하고 추수하는 법을 알려주는 ‘농가월령가’는 지금도 농가에서 유용하게 쓰고 있다. 자연의 선물인 24절기는 사람도 ‘인생 농사력(農事曆)’으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 60년(60갑자)을 한 사이클로 보고 2년 6개월씩 쪼개 24절기의 이름을 붙여보는 것이다.

서울 잠실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6월 7일∼9월 13일)에서 지저스(예수) 역을 맡고 있는 배우 박은태를 11일 만나봤다. 그와 인터뷰를 하며 기자는 인생 24절기를 떠올렸다. 인생 농사력을 처음 주창한 역학자 김태규 씨는 박은태처럼 입춘에서 대설까지 각 절기에 맞춰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1981년 6월 14일생. 우리 나이로 35세인 그는 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삼형제 중 막내인 그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부모님 밑에서 중고교 시절 열심히 공부했다. 좋은 직장에 취직해 효도를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나중에 뮤지컬 배우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다른 이보다 특별히 예능감이 있거나 노래를 잘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단, 노래를 즐겨 불렀고 남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는 갖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 대학 축제의 가요제에 여러 번 참가했지만 번번이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러니 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변신의 기회가 찾아온다. 2001년 MBC 강변가요제였다. 그의 나이 스무 살, 인생 농사력으로 보면 소만(小滿)의 시기다. ‘인생 24절기’ 중 특히 기자가 주목하는 절기가 바로 소만이다. 양력으로 5월 말과 6월 초인 이 시기는 여린 싹이 땅 위로 고개를 내밀어 풍성한 가을을 기약하는 때다. 이때 싹을 틔우지 못한 식물은 그대로 시들어버리고 만다. 1년 농사의 성패를 가르는 시기이다. 인생 농사력에서도 성공할 인생과 그렇지 못할 인생이 갈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성공하는 인생들은 대개 이 시기에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확인한다. 박은태 역시 강변가요제에서 우연찮게 동상을 받았다.

“사실 제가 노래를 썩 잘해서 받은 게 아니에요. 패자부활전을 두 번이나 거쳐서 받은 것이니 억세게 운이 좋았던 셈이지요. 그저 부모님과 동네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고, 또 잘난 척하고 싶은 어린 마음에 가요제에 나가 좋은 추억거리를 만든 것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강변가요제가 가수들의 등용문이라는 것도 옛말이었어요. 2001년을 끝으로 강변가요제도 문을 닫았잖아요.”

그러나 소만에 틔운 싹은 쉽게 꺾이지 않는 법. 저 멀리 희미한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노래부르기가 현실적인 의미를 띠고, 도전의식 같은 것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대학교 2학년 때 군에 입대해 해군홍보단에서 복무했다. 음악전문가들과 군 생활을 같이 하면서 꿈을 키워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아무리 제가 노력해도 노래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사실 제가 남들 눈에 확 띌 만큼 타고난 목소리가 아니거든요. 심지어 ‘강변가요제 나온 것 맞느냐’고 의심하는 이도 있었고, ‘공부나 해. 너는 공부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라는 말도 숱하게 들었어요. 주위에서 하도 그러기에 저도 헛된 꿈을 접고 정신 차려서 공부나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대한 후 복학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때 한양대 경영학과 학생들이 120여 명 정도였는데 4등까지 하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리니까 너무 좋아하셔서 ‘아, 나는 공부에 재능이 있나 보구나’ 생각하고는 노래는 그냥 취미로 삼자고 결심했지요.”

근 1년간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진짜로 열심히 공부했단다. 그러다 25세가 되던 해, 억지로 잠재웠던 싹이 또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대학교 축제 행사, 가요제 같은 것이 열리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고, 앞으로의 인생 항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갈등과 번뇌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3개월간의 고민 끝에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노래를 하는 쪽으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지저스 역을 맡아 부르는 노래를 들어봤습니다. 청아한 느낌의 미성인 듯하면서도 객석을 장악하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 등 다양한 창법을 구사하던데요. 데뷔 전 노래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정도인데….

“제 노래에 늘 따라붙는 평가가 있었어요. ‘너의 노래는 발음이 또박또박하고 너무 정직해. 뭔가 그루브(groove)가 느껴지지 않아’라는 겁니다. 이게 저한테는 엄청 스트레스였어요. 2000년대 중반 우리나라는 흑인음악이 한창 유행해 그루브와 솔(soul)을 중시하던 때였어요. 어렸을 때 그런 장르의 악기를 다뤄본 적도 없고, 흑인의 감성을 타고나지 않은 이상 어디 일이년 공부한다고 습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조시 그로번이라는 미국인 가수의 팝페라를 접하게 됐습니다. 눈이 번쩍 뜨였죠. 그루브 없이도 솔이 느껴지는 창법을 구사하는 거였어요. ‘앗! 저거다’ 했죠. 내가 잘할 수 있는 장르가 있다는 걸 발견하고 가슴이 뛰었어요. 그때부터 휴학하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고 본격적으로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했지요.”

박은태는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음악 스승으로 조시 그로번을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물론 만나본 적도 없지만 음악을 통해 사제지간을 자처했다. 바로 이 대목이다. 소만의 시기에서는 자신의 인생에 극적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거나 기연(奇緣)을 만나게 된다. 일반인들도 이때 직업적 변동이나 변신의 기회를 맞는다.

―목소리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연기자들이 부럽지는 않던가요?

“옛날엔 부러웠죠. 그러나 지금은 안 그래요. 성악 공부를 꾸준히 해오면서 제 실력도 덩달아 늘어나는 것을 체험했으니까요. ‘계속 노력하면 앞으로도 더 늘 수 있겠구나’하는 확신을 가진 이후부터는 타고난 천재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결국 노력이 정답입니다. 그리고 성악공부를 하면서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남을 바라보지 않고 나만 바라보는 방법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30대 치고는 ‘내공(內功)’이 단단하다. 스스로 체득하지 않고서는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 절기로 하지 무렵인 2007년 정식으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한 후 질풍노도처럼 한국 뮤지컬계를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그랭구와르 역, ‘햄릿’의 햄릿과 레어티스 역, ‘모차르트’의 모차르트 역, ‘프랑켄슈타인’의 앙리 뒤프레 역, ‘엘리자벳’의 루이지 루케니 역, ‘지킬앤하이드’의 지킬과 하이드 역, 그리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지저스 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공연된 굵직한 뮤지컬에서 잇달아 중요 배역을 맡아 마음껏 기량을 쏟아냈다. 그리고 2010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서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더뮤지컬어워즈의 남우주연상(2014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딤프 어워즈의 올해의 스타상(2013년, 2015년)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절정의 시기를 달리고 있지만 그는 지금도 성악 레슨을 받고 있다고 한다. 동료후배들이 그를 ‘연습벌레’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만하다.

“저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노력으로 대신하고 있어요. 노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재능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후배들에게 저는 ‘나를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노력은 저의 존재 이유이고, 제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연 중에도 성악 레슨만큼은 빼놓지 않고 있어요.”

그와 인터뷰할 때는 공연을 불과 2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라이브 무대라 긴장이 안 되는 지 물어봤다.

“똑같은 무대에 계속 서면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매번 정말 죽을 만큼 긴장돼요. 뮤지컬 배우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노출된 고위험군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큰 걱정은 목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랑 갑자기 가사가 틀리거나 생각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에요. 저는 무대에 서기 전 긴장과 두려움을 풀기 위해 앞에 한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풀이해 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무대에 오르면서 가장 신경 쓰는 게 있다면….

“뮤지컬 관객들은 매우 냉정합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감정이입이 되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금방 알아챕니다. 그 반응도 즉각적, 직설적이죠. 그래서 일관되게 공연의 질을 유지하는 게 뮤지컬 배우가 명심해야 할 자세예요. 사실 똑같은 컨디션으로, 그리고 매번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뮤지컬 무대에 서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오늘은 이런 걸 보여줘야지’ ‘관객들에게 이런 느낌을 전달할 거야’ 하는 욕심을 내려놓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날의 파트너 배우가 주는 눈빛, 그날의 관객이 주는 호응에 맞춰 가사와 음악을 따라가면, 오히려 연기력이 극대화되고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작품이 나올 때가 많더라고요. 그런데 그 버린다는 게 진짜 어려운 것 같아요.”(그는 인터뷰를 끝내고 곧바로 오른 무대에서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부르는 ‘겟세마네(Gethsemane)’를 울음이 밴 극도의 감정이입으로 열창해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뮤지컬에 바쳤다고 말한다. 그래서 공연 중에는 일체의 외부 활동을 중단하고 수도승처럼 산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런 일이 계속되다보니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도 다 떠나버렸다고 한다. 아내(탤런트 고은채)와 세 살배기 딸과의 가정생활 외에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도 모두 내려놓았다. 특별한 취미 같은 것도 없다. 잠자기 정도가 취미라면 취미란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박은태는 인생 24절기 중 이미 가을의 절정기로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간사한’ 몸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담금질한다. 성공한 인생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지저스(박은태·오른쪽)와 유다(한지상)가 갈등하는 장면인 ‘마지막 만찬’.
▼ 박은태가 말하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제대로 즐기기 ▼

대사 없이 노래로만 진행… 솔로곡 ‘겟세마네’엔 비종교인도 전율

뮤지컬은 음악과 함께 배우의 힘과 에너지로 공연장을 채우는 라이브 무대다. 배우들의 독특한 목소리와 개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만큼 배우들의 긴장감은 매우 크다. 특히 박은태가 현재 출연 중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출연 배우에 따라 작품의 매력이 달라지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대척점에 서서 팽팽한 긴장감으로 무대를 이끌어가는 지저스 역과 유다 역은 어떤 배우들이 호흡을 맞추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배우들의 개성 못지않게 음악의 힘도 느껴볼 일이다. 송스루 뮤지컬(Song Through Musical·대사 없이 노래로만 진행하는 뮤지컬)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서곡(序曲)부터 마지막의 커튼콜 무대까지 음악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특히 박은태가 부르는 솔로곡 ‘겟세마네’는 완창이 힘들 정도의 고난도 음악으로 유명하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에 고뇌하는 지저스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노래다. 그는 “관객들이 제 노래에, 그리고 작품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느낄 때마다 나도 전율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은태는 예수와 12제자가 등장하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누구나 부담 없이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뮤지컬 애호가들은 ‘오페라의 유령’, ‘캣츠’의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대표작으로서 전형적 뮤지컬 작품으로 즐길 수 있고, 종교인은 성극이나 종교극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 또 현대적인 편곡과 캐릭터의 디테일 등 드라마적 요소도 매력적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한국에서는 마지막 공연이 될 수도 있다는 ‘엄포’도 잊지 않았다.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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