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나스면 학생들 만나야 돼, 그 고생한 걸 알리야 돼"

윤정민.송봉근 입력 2015. 8. 20. 01:13 수정 2015. 8. 2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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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 13명의 증언 <4> 93세 박숙이 할머니의 술고향 남해에서 조개 캐러 가던 길일본 군인들 목에 칼 대고 끌어가중국 위안소 6년 지옥같은 생활말 안듣는다고 대검에 찔린 적도
박숙이 할머니는 청소년 대상 강연이 있을 때면 늘 “일제시대 조상들이 고생한 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지면서 강연은 접어야 했다. [남해=송봉근 기자]
할머니가 직접 담근 술. 할머니는 술을 이웃과 나눠 마시며 얘기하는 걸 좋아했다. [남해=송봉근 기자]

“학생들 만나서 옛날 역사를 알리야 하는데…속이 마 답답하고 팔다리가 다 부어서 아무것도 몬한다.”

 지난 6일 경남 남해군 자택에서 만난 박숙이(93) 할머니는 연신 신음을 뱉어냈다. 할머니 말처럼 팔과 다리는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목소리는 귀를 대야 겨우 들릴 정도였다. 지난해까지는 사람들 앞에서 ‘눈물 젖은 두만강’ 한 자락을 구성지게 뽑아냈지만 최근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박 할머니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할머니 옆에 있던 김복기(55) 노인복지사는 “불과 2, 3년 전만 해도 산에서 약초를 캐 술을 담그고, 그 술을 이웃들에게 나눠주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걸 낙으로 아셨다”고 전했다. 지금도 할머니 머리맡과 냉장고 안에는 할머니가 아끼는 술이 있다. 이웃과 한 잔씩 나눠 마시며 시름을 잊게 했던 술이지만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 술병에 손을 뻗기도 힘겹다. 뜨개질도 손을 놓은 지 오래다. 그러나 일본에 당한 기억조차 잊은 건 아니다. 할머니는 힘을 짜내 “옛날 일정시대에 고생한 걸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가 강제로 위안소에 끌려간 건 열여섯 살 때였다. 남해에서 태어나고 자란 할머니는 사촌언니와 함께 바닷가에 바래(조개 캐기)를 하러 가던 길에 일본 군인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두 소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강제로 검은색 차에 태웠다.

 끌려간 곳은 일본 나고야였다. 그곳에서 조선 소녀 10여 명과 함께 창고에 갇혔다. 며칠 후 갑자기 소녀들에게 일본 옷을 입히고 화장을 시키더니 어딘가로 다시 끌고 갔다. 배로, 그리고 트럭으로 며칠이나 갔을까. 할머니는 중국 만주의 위안소에 도착했다.

 다음날부터 텐트를 개조한 위안소로 일본 군인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말을 듣지 않으면 구타도 서슴지 않았다. 할머니는 고통 속에 손목을 긋기도 했지만 돌아온 건 또 한 차례의 매질이었다. 거듭된 폭행에 허리가 부러졌고, 허벅지를 대검에 찔리기도 했다.

 만주와 상하이에서 지옥 같은 6년을 보낸 뒤에야 해방이 찾아왔다. 할머니는 어수선한 틈을 타 다른 소녀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위안소를 탈출했다. 그때 할머니의 사촌언니는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위안소를 나왔지만 고향 땅은 멀기만 했다. 돈 한 푼 없었던 할머니는 2년여 동안 중국인 홀아비 집에서 지내며 그가 주는 푼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1948년 드디어 조국 땅을 밟았지만 곧장 고향에 가지 못하고 부산으로 향했다. 글을 익히지 못한 할머니는 고향이 정확히 어딘지도, 돌아갈 방법도 알지 못했다. 3년간 부산의 목욕탕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렸을 적 “‘화방사’에 갔다 온다”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고, 화방사가 있는 남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진 고초 끝에 11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도 할머니는 사고무친이었다.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다른 가족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위안소 생활로 아기를 가질 수 없게 된 할머니는 남은 생을 혼자 견디려 했다.

 그때 아이들이 나타났다. 이웃에 살던 할아버지가 “아이를 좀 봐달라”고 해서 맡았는데, 할아버지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아이를 양딸로 삼았다. 얼마 후엔 동네 처녀가 사내아이를 맡긴 뒤 종적을 감췄다. 고아원을 찾았다가 또 다른 딸과도 인연을 맺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만난 1남2녀를 키우면서도 자녀들이 결혼하고 손주들이 장성할 때까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숨겼다. 그러다 2012년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277번째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그때 나이 아흔이었다.

 이후 박 할머니는 남해여성회와 함께 지역의 학교를 돌며 학생들을 만났다. 앞으로 건강이 나아지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도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다. “몸이 나스면 학생들한테 옛날 역사 가르치고 싶어. 일정시절 역사… 강단에 댕기면서 내가 대학생들, 고등학생들 많이 만났어.”

 지금 할머니는 병세가 더 심해져 집을 떠나 남해의 한 요양원에 입원한 상태다. 지난 14일 남해 ‘숙이공원’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도 참석하기로 했었지만 끝내 가지 못했다. 숙이공원은 박 할머니의 이름을 딴 공원이다. 그곳에 할머니의 어린 시절 조개 캐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서 있다.

 할머니는 언제쯤 소녀상을 만나고, 언제쯤 일본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자리에 누운 할머니는 제막식 때 입으려던 고운 한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름진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남해=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중앙일보가 창간 50주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위안부 피해 할머니 13인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 중입니다. 할머니들은 자기 생의 끝자락을 버티게 하는 소중한 대상을 하나씩 소개했습니다. 이번 영상은 온라인 중앙일보(joongang.joins.com)와 QR코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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