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독립투사 후손 최경식씨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안정섭 2015. 8. 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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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뉴시스】안정섭 기자 = "울산에서는 처음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광복 70주년을 하루 앞둔 14일 울산 중구청에서 만난 지역 독립유공자 후손 최경식(84)씨는 이렇게 말했다.

최씨는 순국선열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알리고자 2005년부터 9년간 광복회 울산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1일 서울, 평양 등지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점차 전국 곳곳으로 퍼져갔다.

울산에서는 같은해 4월2일 울주군 언양을 시작으로, 6일 중구 병영, 8일 울주군 남창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천도교 언양교구에서 계획한 언양만세운동에는 최씨 가족 여러명이 함께 참여했다.

최씨의 아버지 최해선(1898~1934) 선생을 비롯해 조부 최석호, 백부 최해규, 중부 최해식, 고모부 이귀장 씨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외삼촌 이귀로씨는 언양일대 독립운동자금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이들은 천도교 소속 이무종, 이규천 등과 함께 언양면사무소에 있던 등사기를 이용해 며칠동안 밤새 태극기를 제작, 마침내 4월2일 오전 언양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최씨는 "당시 21살에 불과했던 아버지는 장터 곳곳을 뛰어다니며 상인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이 시작될 것임을 알렸다"며 "울산 첫 만세운동에서 '대한독립만세'을 가장 먼저 외친 사람이 바로 우리아버지"라고 말했다.

곧바로 일본 헌병들이 몰려와 만세운동을 저지하면서 1명이 총상을 입었고 최씨 가족 등 모두 22명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1년 반동안 옥살이를 한 최해선 선생은 이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만주로 이동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건강이 점점 악화된 최 선생은 1934년 36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뒀다.

만주에서 태어나 자란 최씨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1일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왔다.

최씨는 "70년 전 울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울산에 돌아와 지금의 삼산지역에 살던 고모의 도움을 많이 받아 자리잡게 됐다"고 말했다.

최씨는 울산 중구에서 유명 제과점과 음식점을 35년간 운영했다. 최씨의 두 형은 과거 지역 최대 규모였던 미진백화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현재 울산지역에는 총 56명의 독립유공자 유족이 살아가고 있다.

월 52만원(표창애지)에서 188만원(1~3등급)의 국가 보상금을 받아 평범하게 살고 있으나 형편이 넉넉지 않은 유족들이 많다.

최씨는 무엇보다 울산지역에 독립기념공원 조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최씨는 "지난해 문을 연 경남 하동독립공원을 가보니 정말 부러웠다"며 "인구 3만명에 불과한 하동에도 있는 독립공원이 120만명이나 사는 울산에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상북면사무소와 언양시장에 있는 독립기념비를 옮겨와 작천정 일대에 독립공원을 시급히 조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려면 정부 차원의 노력도 필요하다.

최씨는 "수십년째 안중근 의사의 넋을 기리며 제를 지내는 일본 헌병 '지바 도이치' 가문을 보면 부끄러움이 앞선다"며 "짧은 기념식, 얼마안되는 보상금보다는 독립투사의 생가 보존, 독립기념공간 조성 등 정부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전했다.

yoha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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