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 비서 "일제가 항복한 날, 나 혼자만 쓸쓸했다"

남형도 기자 2015. 8. 14.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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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김우전 광복회 전 회장 "임시정부 재조명해야"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광복 70년]김우전 광복회 전 회장 "임시정부 재조명해야"]

"그날 저녁 장교식당에서 종전 소식을 들었습니다. 김구 주석의 사명과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 모두가 허사가 된 것 같아 실신 상태로 멍하니 허공만 쳐다봤습니다."

1945년 8월 9일. 일제의 항복으로 종전소식이 전해졌던 날, 김구 선생의 기밀업무를 수행하는 기요비서(機要秘書)였던 김우전(93) 광복회 전 회장은 혼자 허탈한 심정을 느꼈다. 임시정부가 계획 중이던 한미 공동 진공작전을 국내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리라는 특명을 받고 최전방에 잠입하기 위해 미군 수송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종전 소식을 들은 미군들이 환호하는 광경을 혼자서 쓸쓸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11일 김 전 회장을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자택에서 만났다. 김구선생의 비서로, 독립군의 연락장교로 활약했던 그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소회에 대해 "매년 광복절을 맞을 때마다 쓸쓸한 기분이 들었는데, 올해는 유독 더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고령이라 허리가 아파 한 걸음을 떼기 힘들어하면서도 독립군과 임시정부를 이야기할 때만큼은 힘 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설명을 이어나갔다.

192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난 김 전 회장은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 등을 하며 교토에 있는 야간대학을 다니며 낮엔 변호사 사무소에서 보조로 일했다. 그러던 중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선변호 요청이 들어온 걸 알게 됐다. 조선의 문화를 알려 민족의식을 고취시겠다며 독립운동을 하다 잡힌 사람이었다. 독립운동가를 수차례 면회하며 김 전 회장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그 때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43년 일본에 강제징집을 당해 학업을 중단하게 됐다. 입대 전날 저녁 일본에서 인연을 맺은 독립운동가의 아버지가 김 전 회장에게 태극기를 어깨에 매어줬다. 그가 처음 본 태극기였다. 당시 태극기를 가지고 있으면 일제로부터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일본군에 강제징집 된 뒤 김 전 회장은 탈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감시가 가장 느슨한 일요일 오후를 틈타 그는 내무반 반장의 의복을 훔쳐 수풀 속에서 갈아입고 외출 나가는 것처럼 도망쳤다. 그 길로 광복군에 합류해 군관학교에 들어갔고, 1944년 10월 졸업 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김 전 회장은 "당시 48명이 졸업했는데 한성수 동지는 모병과 군자금 조달 등을 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며 "당시 한 동지의 법정진술 기록을 보면 '일본어는 원수의 말이다. 나는 한국말만 하겠다'며 재판을 진행했더라"고 말했다.

광복군의 연락장교였던 김 전 회장은 미군 중앙정보국(CIA) 전신인 전략첩보부대(OSS)의 버치 대위를 만나 광복군 첩보작전에 필수적인 무전교육을 받기로 합의했다. 중국군이 반대하자 그는 8일간 208km를 걸어 비행장에 도착해 곤명으로 향한 뒤 제14미공군 세놀트 사령관을 직접 만나 합의를 이뤘다. 이후 한국 임시정부는 미군과 공동으로 한반도 상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중경 임시정부로 돌아간 지 한 달여 뒤인 4월 6일 김구 주석이 김 전 회장을 판공실로 불러 면담을 청했다. 김 주석은 "광복군이 진행할 공동작전 상황을 국내 독립운동가와 지도자들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며 김 전 회장에 임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 주석은 김 전 회장을 기요비서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을 하얀 명주천에 써내려갔다.

김 전 회장은 "처음엔 머뭇거렸지만 임시정부의 김학규 장군이 저를 택했다는 말을 들은 뒤 용기가 나서 두렵지 않았다"며 "김 주석이 윤봉길 의사의 회중시계를 보여주며 저를 격려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미군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종전되자 김 주석은 수년 간 애를 써서 참전준비를 한 게 허사가 됐다고 통탄했다고 김 전 회장은 전했다. 김 전 회장은 "광복군으로 다 하지 못한 허물과 김구 주석 기요비서의 사명에 대해 참회를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동지들의 이름을 한 명씩 힘주어 부르며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회장은 "저는 독립운동을 1년 동안 한 것도 힘들었는데, 임시정부의 동지들은 30년 동안 1만리 길을 피난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다"며 "선열들의 훌륭한 역사를 알고 우리 민족이 단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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