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難民 운동 10년.. 우리 호흡은 찰떡

김승재 기자 2015. 8. 1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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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일가상' 선정 김종철·박진숙씨] 남편, 구금된 이주민 등 법적 보호.. 아내는 통역·이주여성 자립 도와

"주변 분들이 '남을 위해 희생하느라 힘들겠다' '돈이 없어 고생하겠다'고 저희를 걱정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희가 도와준 외국인 난민이 우리나라에서 자리 잡고 자존감을 찾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김종철(44)·박진숙(41)씨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부부 난민(難民) 돕기 운동가'다. 외국인 난민이 국내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다수일 정도로 척박한 환경에서 남편은 변호사로, 아내는 사회적 기업가로 서로 의지하며 10년 넘게 난민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인종·종교·정치적 차별과 박해를 피해 한국에 들어와 사는 외국인 난민은 현재 1200여명이다.

일가재단은 지난달 29일 부부를 '청년일가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일가상은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일가(一家) 김용기(1909~1988) 선생을 기려 농업·산업·사회공익 부문에 공헌한 이에게 1991년부터 수여해 온 국제상이다. 남편은 난민과 구금된 이주민, 무국적자가 법의 보호를 받도록 돕고, 아내는 사회적 기업에서 난민 여성과 이주 여성이 자국 수공예품을 만들고 팔아 자립하도록 지원해온 공로다.

두 사람이 난민에 관심을 둔 것은 김씨가 사법연수원생 시절 난민 보호 단체 '피난처'에서 자원활동가로 일한 것이 계기가 됐다. "난민의 생은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가득 찬 한 편의 소설 같았어요.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용기로써 뚫고 온 그들 사연을 듣고 뭐라도 보태주고 싶었어요."

김씨는 변호사가 된 뒤에도 난민 지원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전업(專業)으로 삼기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망설이던 그에게 힘을 준 게 아내였다. 남편을 위해 난민 통역을 하다가 본격 동참한 아내는 2009년 난민 여성과 결혼 이주 여성이 자립하도록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 '에코팜므'를 만들었다. "아내가 사회적 기업을 척척 꾸려나가는 걸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2년 뒤 김씨는 로펌을 그만두고 공익법센터 '어필'을 출범시켰다. 후원금으로만 운영하는 난민 지원 단체다.

난민 운동 10년, 지치거나 힘들 때 그들은 서로 버팀목이 돼준다. 뒷바라지해 온 난민이 갑자기 연락을 끊거나 무리한 요구를 해 올 때면 회의(懷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난민은 당장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할 뿐, 특별히 도덕적이거나 착한 이들은 아니다. 우리가 상처받진 말자"고 서로 위로한다. 부부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 좀 더 공정하고 적극적인 난민 심사다. "매년 수천 명이 한국의 문을 두드려요. 하지만 까다로운 법무부 심사 때문에 인정률은 6%에 불과합니다. 국제사회 당당한 일원이 되려면 벼랑 끝 난민부터 감싸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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