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범죄 현장이 나의 무대".. 40년 형사의 앙코르공연

입력 2015. 7. 23. 03:00 수정 2015. 7. 2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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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송도순, 김병기, 전유성….’

그가 건넨 중앙대 연극영화과 동창회 수첩에 적힌 67학번 이름들이다. 송도순 씨는 성우로, 김병기 씨는 탤런트로, 전유성 씨는 개그맨으로 전공을 살려 활약했다. 수첩을 건넨 그의 이름도 적혀 있다. 김원배(67). 그의 직업란엔 전공과 어울리지 않게 ‘강력계 형사’라고 적혀 있다. 지금은 경찰청 범죄수사연구관으로 일한다.

그는 동기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하지만 한 번도 연극판을 떠나지 않았다고, 지금까지도 한복판을 휘젓고 다닌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 제복 입은 ‘딴따라’

“야, 너 지금 연극 하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베테랑 선배 형사는 가소롭다는 듯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연극 연출가를 꿈꾸던 그의 눈엔 사건 현장이 늘 무대처럼 보였다. 범인이 범죄를 저지르고 사건 현장이란 무대 위에서 사라진다. 형사인 그는 무대에 올라 범인이 남긴 흔적을 좇는다. 단서를 조합해 범인의 범죄 행위를 머릿속에 그린다. 곧 배우의 동작과 동선이 된다. 범죄 현장에 남은 증거품은 무대 위 소품처럼 하나하나 챙긴다. 연출자의 시각으로 연극을 만들듯 수사하다 보니 종합적으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그는 7남매 중 장남. ‘딴따라’ 기질을 숨길 수 없어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해병대 전역 후 복학했다가 아버지의 목재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졸업은 못했다. 돈이 없어 몸만 달랑 전북 무주 집으로 내려왔더니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볼 낯이 없었다. ‘나 같은 인간이 집에 있어선 안 된다. 돈만 쓸 줄 아는 딴따라인데….’

가족에게 손 벌릴 수 없어 1973년 순경이 됐다. 충남 금산의 한 파출소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 파출소의 신고전화는 좀처럼 울리지 않았다. 마을 청소년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고 대민 봉사 활동만 즐겁게 했다. 신기하게도 주민과 살갑게 생활하다 보니 제보가 쏟아졌다. 친해지니까 제 발로 찾아와 수갑을 채워 달라는 절도범도 있었다. 검거 실적이 가파르게 올랐다. 1978년 강력계 형사로, 1980년 서울의 한 경찰서 강력계에 스카우트됐다.○ ‘연극유추법’ 형사

“저기 마네킹이 있다. 가 보자.”

한창 장난감 칼싸움을 하던 아이들 눈에 낙엽 밖으로 삐죽 빠져나온 팔이 보였다. 호기심에 달려간 아이들은 손으로 만져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거벗은 채 꽁꽁 얼어붙은 여성 시신이었다. 아이들은 가까운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했다. 1983년 1월 11일 서울 금천구 시흥동 호암산 중턱에서 발견된 시신은 ‘아마추어 사진작가 죽음 연출 살인 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세상을 놀라게 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온 김 씨가 ‘연극유추법’이란 독특한 수사 기법을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경찰은 현장 증거를 바탕으로 망자(당시 24세)의 신원을 확인하고 보일러 설비 기사 이동식(당시 42세)을 범인으로 붙잡았다. 이동식은 동네 이발소 면도사로 일하던 피해 여성과 사귀고 있었다. 이동식은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으로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탄 실력 있는 아마추어 작가였다. 망자는 그런 남자에게 호감을 느꼈다. 강력팀은 이동식이 아내와 자식에게 불륜 사실을 들킬까 걱정돼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으로 보고 수사했다.

하지만 김 씨의 눈과 머리는 더 깊은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겨울이었지만 울긋불긋 고운 낙엽이 시신 주변에 놓인 점에 그의 시선이 꽂히면서 ‘예술 작품을 만들려는 장치’는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 순간 이동식의 카메라가 떠올랐다.

이동식이 아내, 전처, 불특정 여성들을 찍은 사진이 대거 발견됐다. 사진 속 여성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포르노 배우 같은 성적인 자세를 취했다. 밧줄로 목을 묶거나 칼로 가슴을 찌르는 흉내를 낸 괴이한 사진도 많았다. 낙엽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는 망자의 사진도 딱 한 장 나왔다.

그는 작품에 욕심내는 사진작가가 한 장만 찍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끈질기게 추궁하고 탐문한 끝에 이동식이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사진 21장이 담긴 필름을 찾았다. 사진 속에는 숨진 여성이 청산가리를 먹고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과정이 순차적으로 담겨 있었다.

사진은 1982년 12월 14일 일어난 일을 증언했다. 그날 호암산에서 이동식은 “누드 사진을 찍기 위해 옷을 벗으면 감기가 들 수 있으니 감기약을 먹어 두라”며 청산가리가 든 약을 피해 여성에게 먹였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이동식은 여성이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극치의 쾌감을 맛보려 했다”며 “과거 찍은 사진들은 연습 과정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동식은 1986년 사형당했다.

‘그(이동식)는 극약을 먹여 내연 관계 여인의 목숨을 끊고 그 순간을 카메라에까지 담는 ‘여유’를 보였다. 발작적이랄까, 도착적이랄까. 참으로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경악과 충격을 던져 준 살인사건이었다.’(1983년 1월 21일 동아일보)

○ 한국에서 일어난 살인 총망라

형사는 오랫동안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 범죄분석관으로 일했다. 사건 현장을 연극 무대로 옮기는 ‘연극유추법’으로 사건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그의 보고서는 정평이 났다. 일선 경찰서에서 보내준 사건 기록만으로 무대가 잘 그려지지 않으면 직접 현장에 나가 자문과 수사를 했다.

그는 2005년 ‘한국의 살인 범죄 실태와 수사’란 책 5권을 만들었다. 경찰 내부용인 책엔 그가 수집하고 연구한 살인사건 1750여 건을 57개 유형으로 분류해 정리했다. 2010년 ‘살인사건 분석’이란 책 2권도 만들었다. 그 안에는 성공한 수사뿐만 아니라 1998년 ‘사바이 단란주점 살인사건’ 같은 실패한 수사도 기록돼 있다. 과시용이 아니라 다음 무대에 설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만든 책이다. 실제로 2009년 강호순의 연쇄 살인을 밝혀내는 데 그의 자료가 큰 도움을 줬다. ‘여경의 전설’로 불리는 강서경찰서 박미옥 강력계장은 “선배는 치정 살인부터 ‘묻지 마 범죄’까지 한국 살인의 고전부터 현대까지를 기록으로 총정리한 분”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이 책엔 존속살인 무대에 오른 한국인의 모습도 담겨 있다. 친자식은 친부모를 살해할 때 칼로 여러 번 찌르고, 시신도 불태우거나 토막을 내는 등 심하게 훼손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친부모는 제 자식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려도 시신을 훼손하지 않는다. 시신을 유기할 때도 하늘을 향해 가지런히 눕혀 줬다.

범죄 피해자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다. 하지만 미제 사건 피해자는 여성이 더 많다. 여성이 범죄에 희생되면 치정에 의한 범죄라고 속단한 나머지 과거 남자관계를 밝히는 데 몰두하다가 초동 수사를 망치는 게 이유라고 설명했다.

○ 경찰 수사견 양성 교관

형사는 2005년 6월 경위 계급으로 퇴직했다. 은퇴 후에도 범죄수사연구관으로 일하며 ‘연극판’을 떠나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의 곁에 늘 경찰 수사견 포순이(10년생·골든레트리버)와 포돌이(5년생·래브라도레트리버)가 있다는 점. 경찰 수사견 아이디어는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초동 수사를 해야 할 경찰이 실종자, 시신 등을 찾느라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직접 호주, 일본 경찰견 학교로 건너가 고유한 냄새로 범인, 실종자, 시신을 찾는 경찰견 양성 과정을 배웠다. 경찰견 연구학회까지 만들어 보급에 힘쓰고 있다.

그는 2013년 12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수도권의 한 경찰서에서 사건 해결을 도와 달라고 했다. 포순이와 함께 도착한 빌라의 거실과 주방에는 밀가루와 소금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한 범인의 교란작전이었다. 범인은 30대 주부가 자녀를 학원에 보내려고 문을 잠그지 않고 나간 사이 집안에 침입했다.

범인은 비열했다. 5시간 동안 집안에 머무르며 주부의 벗은 몸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죽은 척하라고 시킨 다음 사진도 찍었다. 주부의 친구가 빌라 문을 두드리자 칼로 피해자를 찌르고 도주했다. 피해자 옷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그는 범인이 주부를 폭행할 때 휘두른 골프채 손잡이를 포순이 코에 갖다 댔다. 잠깐 킁킁거린 포순이는 무대 밖으로 멀리 달아난 범인을 뒤쫓았다. 골목길을 한참 걷더니 어느 골목의 의류수거함 앞에 가만히 서서 형사를 올려다봤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범인의 흔적을 찾아 붙잡을 수 있었다.

○ 에필로그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해요.”

형사 수첩을 탁 덮으며 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40년 형사 인생을 들려주면서 일일이 기록을 찾아 보여줬다. 기억에 의존하는 법이 없었다. 각종 수사기록으로 꽉 찬 방에서 지금도 사건을 기록하고 수사 매뉴얼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책상 위에 담뱃갑이 보이기에 담뱃값 인상과 범죄율도 분석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그는 ‘최고의 연극 연출가’가 되겠다던 청운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범죄 현장을 연극판 삼아 누비고 다니며 아쉬움을 달랬다. 딱 1년 대학로 파출소장을 지내며 연극 무대를 가까이한 것도 소중한 기억이다. 이곳에서 한국연극협회로부터 연극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다.

인터뷰 사진을 경찰청 대강당 무대에서 찍었다. 포순이와 나란히 서서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는 “행복하다”고 했다.

“비록 연극 연출가가 되진 못했지만 사건 현장을 연극 연출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수사하고 살았으니 원이 없죠. 그저 프로 경찰이었다, 진정한 짜부(형사)였다고 불러주면 만족합니다.”

이 말을 남기며 웃던 형사의 눈은 그윽하게 포순이를 향해 있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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