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4) 세계와 소통하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

2015. 7. 1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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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살아왔을뿐,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는다"

국악의 세계화를 물어도, 행복에 대해 물어도 전혀 다른 답이 돌아왔다. 그는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었다.

명인(名人)은 기인(奇人)인 듯했다. 답변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고 대화는 겉돌았다. 그는 정성을 다했지만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이해하기엔 살아온 세월이 너무 부족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인이 도인(道人)인 듯도 보였다. 난감한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빙긋이 웃었다. "그때그때를 살아왔을 뿐, 아무 것도 담아두지 않았다"고 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는 인터뷰 도중 '논어'나 '채근담', 한용운의 시 등 고전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채근담'의 글귀를 인용하면서 "사람도 어떤 일에 마음이 생겨나지만, 그 일이 지나가고 나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사진=김범석 기자

―가야금은 어떻게 만났나.

▲1951년에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천막으로 만들어 놓은 경기중학교 3학년에 다닐 때였다. 천막 근처에 가야금을 하는 노인이 한 분 살았다. 그 노인을 우연히 만나 처음 가야금 소리를 들었을 때, 홀린 것처럼 가야금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분에게 가야금을 배우다 부산에 국립국악원이 세워진 후부터 국악원으로 옮겨 전문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왜 법학과를 선택했나.

▲서울대 음악과가 1959년에 생겼다. 내가 졸업하던 해다. 하지만 당시 국악과가 있었어도 법대에 갔을 것이다. 법대 3학년때 KBS에서 주최하는 전국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음악계에 내 이름이 알려졌지만 그때도 음악 전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국악은 천시받던 시절이었다. 국악을 해서는 먹고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국악과 교수가 됐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서울대 음악과 강사 제의를 받고 시작했다. 여전히 국악과가 곧 폐과될 것이라는 말이 나올 때였다. 1960년대에는 극장 지배인, 출판사, 화학공장 기획관리 등 여러가지 일을 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며 한양대에 이어 세번째로 이화여대에 국악과가 생겼을 때 처음으로 국악으로 먹고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4년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하며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음악을 전업으로 삼겠다 마음 먹었다.

―가야금은 운명이었나.

▲내 의지라기보다 사회가 만든 것이다. 1950년대 전국에 가야금 만드는 공장은 전국에 하나, 1년에 고작 10여대를 만들었다. 지금은 1만대를 만드니까 1000배나 늘어났다. 그만큼 국악이 커진 것이다. 사람이 다 이룬 것 같지만 사실 모든 음악가는 사회가 만든다. 베토벤이 제주도에서 태어났으면 피아노 소나타, 교향곡을 만들 수 있었겠나. 제주도 민요나 부르다 말았지. 베토벤은 위대해서 악성이 된 게 아니라 19세기 유럽 시민계급이 만들어낸 영웅일 뿐이다.

명인은 지난 1964년 국내 최초의 가야금 창작곡 '숲'을 작곡한 이후 '침향무' '미궁' '비단길' '밤의 소리' '춘설' 등 굵직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 전통의 소리를 그대로 담으면서도 새롭고 현대적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발레, 비보이, 재즈 등과 협연을 통해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고 현대와, 그리고 세계와 소통한다.

―많은 장르와 협연했다.

▲내가 작곡한 것을 발레, 비보잉이 좋아서 쓴 것이지, 내가 발레나 비보잉을 위해 작곡한 것은 아니다. 최근 국악계의 주류는 퓨전이다. 나는 퓨전을 반대하진 않지만 관심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요리도 정통 요리가 좋고 세계음악도 순수한 전통음악을 찾아다닌다. 여러 개가 뒤섞이는 건, 재미가 없고 깊이도 없다.

―그래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그건 퓨전과 다르다. 나는 전통 국악을 좋아하는 동시에 현대음악을 좋아한다. 현대음악 중에서도 골치아픈 곡들을 아주 좋아한다. 나는 완전히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다. 내 음악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자기 모방도 하지 않는다. 내 음악은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세계를 지니고 있다.

―국악의 대중화 의지는 있나.

▲국악 대중화에도 아무 관심이 없다. 나는 '황병기만이 만들 수 있는 음악을 만들겠다'는 생각밖에 안한다. 아무도 안 들어도 좋다. 베토벤이 언제 대중화를 위해 했나. 순수한 자기 예술을 만들기 위해, 예술적 완성도만을 생각해 작품을 썼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베토벤 음악처럼 많은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도 없다. 내 음반도 그동안 45만장이 넘게 나갔다. 국악 음반 중 가장 많다. 그래서 대중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 대중은 비대중적인 음악을 듣고 싶어한다. 대중의 수준이 작곡가보다 높을 수도 있다.

그의 음악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지독한 마니아를 만들어냈다. 프랑스 안무가 니콜라 폴은 3년 전 그의 작품 '비단길'로 국립발레단의 창단 50주년 기념작 '아름다운 조우'를 무대에 올렸고, 독일 출신 미술 작가 에버하르트 로스는 지난해 황병기에 헌정하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국악의 세계화는 가능한가.

▲'비단길'로 춤을 춘 프랑스 안무가는 처음부터 조금의 거부감도, 어려움도 없었다고 했다. 파리에서 공연하면 벨기에에서 비행기 타고오는 지독한 마니아들이 있다. 미국 산타크루즈에 있는 한 무용가는 지난 35년간 매년 10~11월 첫 비가 내리는 날, 나의 '가을'이라는 곡을 듣는다고 한다. 국악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여러가지가 필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작품이다. 일단 작품이 좋으면 된다.

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만해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그는 만해 한용운의 말을 인용해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세대 사람들이 나의 시를 읽으면 봄에 꽃수풀에 앉아서 작년에 핀 국화 꽃잎을 코에 비비는 것 같을 것이다." 시집 '님의 침묵' 말미에 '독자에게'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짧은 후기다. 명인은 "만해는 자신의 시가 후대 사람들에게 안 읽혔으면 좋겠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다.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후기지만 나는 그 말을 가장 좋아한다"며 "나도 죽으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사라지고 싶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행복했나.

▲행복한 삶인지 아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때그때 산다. 그러다 죽게되면 그냥 죽는거다. 젊을 때 제일 듣기 싫은 말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uos)"였다. 나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싶다. 평범한지 아닌지는 생각하기에 달렸다.

―명인의 꿈은 뭔가.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기억되고 싶냐'고 묻는데, 나는 기억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으면 깨끗이 사라지고 싶다. 내가 사라진 후 사람들이 내 작품을 듣거나 안듣거나 무슨 의미가 있나. 내 친구 백남준이 말했다.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고. 예술이 꼭 길게 남아야 할 이유는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채근담'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다.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불어오면 대나무가 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바람은 아무 소리도 남기지 않는다. 달밤에 기러기가 호수에 지나가면 그림자가 호수 위를 지나간다. 하지만 기러기가 지나가고 나면 호수는 그림자를 담아내지 않는다." 멋지지 않나. 사람도 어떤 일에 마음이 생겨나지만, 그 일이 지나가고 나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한우물을 파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이 지나고 나면 그냥 비워내는거다.

―최근 세례를 받았다.

▲종교로 가톨릭을 선택했지만 사실 '논어'에 가장 공감한다. 공자는 종교를 얘기하지 않는다. 공자에게 신에 대해 물어보니 '나는 아직 사람을 섬길 줄도 모른다'고 답했다. 죽은 이후에 대해서는 '나는 살아서도 내가 뭘 해야할지 모른다'고 했다. 공자에게 기도는 매일 옳게 사는 것이었다. 죄를 짓고 나서 감히 어떻게 하늘에 빌겠나. 그게 맞는 말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녹음기를 끄며 솔직하게 고백했다. "사실, 잘 모르겠다. 예상한 답변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그러자 그는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녹음된 상태가 아니라 기억 속에서 복원해낸 그의 말은 이랬다.

"공자가 말했어요.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모두 거짓이 된다고. 하늘은 세상 만물을 만들어내고 움직이지만 하늘은 말을 하지 않잖아요. 말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그래서 중국어, 영어, 일본어 모두 다르지. 서로 소통도 되지 않아요. 하지만 원초적인 언어는 어때, 울고 웃고, 다 통하죠. 그래서 말은 아무 의미가 없어."

명인과의 만남은 후유증을 남겼다. 그의 말들이 시도때도 없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찾아 들었다. 조금 이해가 가는 듯도 했다. 채우고 다시 비워내는 과정이 늘 새로운 세계를, 남다른 깊이를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 명인이 된다는 건 남보다 많은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잘 비워내는 것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은 그의 대답에서 멈췄다.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몰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피식 웃음이 터졌다. 마음이 텅빈 듯 가벼워졌다.

seilee@fnnews.com 이세경 기자

황병기 프로필

△79세 △서울 가회동 출생 △경기중·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미국 워싱턴주립대학교 강사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한국음악과 교수로 재직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 △유니세프 문화예술인클럽 회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문화원 겸임교수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ARKO한국창작음악제 추진위원장 △현재 백남준문화재단 명예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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