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조훈현 "내가 묘수를 찾은 게 아니다 그저 생각 속으로 들어갔을 뿐"

입력 2015. 7. 8. 02:37 수정 2015. 7. 1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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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바둑 70년.. 조훈현의 58년 '바둑인생'
‘바둑 고수’이자 ‘인생 고수’인 조훈현에게 생각은 무엇일까. 판을 정확히 읽고, 더 멀리 예측하고, 생각 속으로 들어가라고 그는 얘기한다. 좌우명이 ‘무심(無心)’인 그는 “최선을 다해 평상심을 가지고 임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김태형 선임기자
조훈현 9단이 여섯 살 때 조남철 9단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일본 명인 타이틀을 거머쥔 조치훈 9단과 1980년 기념 대국을 하고 있다(사진·왼쪽).
1990년 국수전에서 제자 이창호와 대결하는 조훈현.

바둑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장 유력한 것은 고대 중국 기원설이다. 중국의 고전 '박물지'에는 기원전 2300년 요(堯)왕이 아들 단주(丹朱)를 깨우치기 위해 바둑을 발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오묘한 흑과 백의 역사가 4300여년이 됐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바둑을 두었다는 설이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백제문화가 일본에 전파될 때 바둑도 함께 건너간 것으로 추측된다. 바둑은 일본 막부시대에 국기(國技)로 대접 받으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바둑을 직업으로 삼는 기사(棋士) 제도와 본인방(本因坊) 등의 바둑가문이 생겼고, 이들에 의해 룰도 정비됐다.

한국에서는 흑·백 각 8개의 돌을 미리 배치하고 두는 순장(順將) 바둑이 20세기 초반까지 성행했다. 그러다 지금과 같은 현대바둑이 도입된 것은 일본에 바둑 유학을 다녀온 조남철 9단에 의해서다. 그는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5일 현 한국기원의 모태인 한성기원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바둑 보급에 앞장섰다. 한국기원은 그날을 한국 현대바둑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올해는 현대바둑이 도입된 지 70주년이 된다. 짧은 역사에도 한국 바둑을 세계 중심으로 이끈 주인공은 단연 조훈현(62) 9단이다. 다섯 살에 아버지 바둑에 훈수를 두기 시작할 때부터 환갑을 넘긴 현재까지 58년간 세계 최다승(통산 1935승), 세계 최다 우승(160회)으로 ‘반상(盤上) 황제’로 통하는 이 시대 최고의 승부사가 조 9단이다. 한국 바둑의 전설인 그는 26일에는 ‘영원한 라이벌’ 조치훈 9단과 70주년 기념 특별대국을 벌인다.

바둑 외에는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해오지 않던 그가 최근에는 자신의 인생을 복기(復棋)한 첫 에세이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을 내 더욱 화제다. 일약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에서 “세상에는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으며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고 역설한 그를 지난 1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났다.

-요즘 근황이 어떤지.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지 오래여서 요즘은 바둑 외의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다. 집 앞에 있는 북한산 등산도 하고 아내와 함께 골프 라운드도 가끔 한다. 8년 전부터 골프를 배웠는데 지금은 보기플레이(핸디캡 18) 정도다. 등산은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모든 잡념을 비우는 데 도움이 돼 지금도 거르지 않는다. 최근에 낸 책이 생각보다 잘 팔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많다(웃음).”

-첫 에세이를 내게 된 동기는.

“재작년 두 달 동안 몸이 많이 아팠다. 병원에서 폐를 찍어보니 사진이 온통 허옇게 나왔다. 의사선생이 ‘암이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고 단순 균이라면 약을 먹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더라. 판정하는 데 2주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그 사이 별 생각 다 들었다. 돌아보니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뭐라도 남겨놓자는 생각으로 책을 쓰게 됐다. 그동안 바둑 관련 책은 많이 냈지만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책은 처음이다. 다행히 암은 아니었지만 건강 때문에 스스로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1995년 금연하기까지 그는 지독한 골초였다. 하루에도 네댓 갑을 피울 정도로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 당시 폐 사진을 봤을 때 ‘올 것이 왔구나’ 했다고 한다.)

-‘영원한 라이벌’로 불리는 조치훈 9단과의 70주년 기념 대국을 앞두고 있는데.

“원래는 12일로 잡혀 있었는데 조 9단의 사정으로 26일로 연기됐다. 바둑에서 라이벌은 자신밖에 없다. 자신을 이겨야하는 게 바둑이다. 예전의 추억을 생각해볼 수 있는 대국이어서 재미있게 한 수 한 수 두고 싶다. 아마 조 9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 대국은 한국이 낳은 두 최고 레전드 기사의 대결로 벌써부터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까지 대결은 총 11차례 있었는데 조훈현 9단이 8승3패로 앞서 있다. 가장 최근 대국은 2003년 삼성화재배 8강전이었는데 조치훈 9단이 불계승을 거두었다.)

-조치훈 9단을 평가한다면.

“일본유학 시절 자주 교유했다. 당시 나는 중간에 병역 문제로 귀국해야 했는데 조 9단은 군대가 면제돼 일본에 계속 머무른다는 얘기를 듣고 기분이 몹시 나빴던 기억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조 9단은 일본 바둑계에서 활약하고 나는 한국 바둑계를 위해 활동하라는 하늘의 뜻이었던 것 같다.”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조치훈 9단은 1980년 일본 최고 타이틀인 명인을 거머쥔다. “명인을 따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던 국내 팬들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90년대에는 기성·명인·본인방 등 3개 메이저 대회를 동시에 석권하는 ‘대삼관(大三冠)’을 네 차례 기록하며 일본 바둑을 평정했다.)

-바둑 인생을 되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대국과 수가 있는지.

“아무래도 ‘바둑 올림픽’이라고 불렸던 1989년 잉창치배 우승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수는 당시 결승 5국 초읽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판세를 뒤집은 129번째 돌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궁금해한다. 절체절명의 그 순간에 어떻게 그런 수를 생각해낼 수 있었느냐고. 그럼 나는 대답하곤 한다. ‘그건 지금의 나도 알 수 없다고. 나는 그저 생각 속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내가 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답을 찾아낸 것’이라고 말한다.”

(이 대회는 지금도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다. 유일하게 한국 대표로 출전한 조 9단은 잇따라 이변을 일으키며 결승까지 진출, 중국 최고 기사인 녜웨이핑과 맞붙게 된다. 1국은 조 9단 승리, 2·3국은 녜웨이핑 승리, 4국은 조 9단 승리로 2승2패를 이루게 된다. 조 9단은 마지막 대국에서 145수 만에 불계승을 거두며 초대 챔피언에 오른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우승상금 40만 달러를 챙긴 그는 김포공항에서 종로까지 카퍼레이드를 하며 금의환향한다.)

-이창호 9단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내제자(집에서 동거하며 가르치는 제자)에게 숱하게 패했는데 그때 기분은 어땠나.

“내가 열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겐사쿠 스승 집에서 9년 동안 바둑을 배웠듯 창호도 아홉 살 때 내 집에 들어와 7년 동안 바둑을 배웠다. 세고에 스승은 바둑보다는 인격, 인품, 인성을 모두 갖춰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나도 창호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1990년 2월 제29기 최고위전 타이틀을 시작으로 95년 2월 마지막 남은 대왕 타이틀까지 창호에게 모두 빼앗겼다. 패배는 언제나 아픈 법이다. 내가 가르친 제자에게 당한 패배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무관의 신세로 전락한 그날은 정말 이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유난히 마음이 평화로웠다. 모든 걸 잃어버렸는데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했다. 지키려 할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막상 다 잃어버리니 자유로웠다.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밑바닥까지 떨어졌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거야’라고. 이러한 긍정적인 생각 덕분에 나는 그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고 마침내 1998년 국수전에서 도전자로 나서서 창호를 꺾고 다시 정상에 오르는 짜릿한 순간을 맛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바둑을 둘 때 몇 수까지 내다보는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다. 굳이 말하자만 한 수부터 수백 수라고나 할까. 수치상으로는 700수 앞을 내다본다. 하지만 실전에선 여러 가지 수를 빼면 몇 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는다. 어떨 때는 수백 수는 고사하고 한 수 앞을 보기도 힘들다.”

-바둑이란 무엇이고 앞으로 하고 싶은 목표가 있는지.

“바둑은 잘 두고 못 두고를 떠나 저한테는 인생의 길이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걸을 것이다. 팬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뭔가를 돌려드리고 싶다. 구체적인 형식이 아직 결정된 건 없지만 서서히 하나 하나 하고 싶다.”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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