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명장열전] (2) 한국 뮤지컬의 대부 윤호진 연출가

입력 2015. 6. 28. 17:20 수정 2015. 6. 2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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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보다 신념이 더 강합니다… 꿈 크게 꾸고 행동하세요"

윤호진 홍익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장이 26일 서울 홍익대 대학로 캠퍼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범석 기자

공전의 대히트였지. 그때 돈으로 12억원 들였는데 12억원을 벌었으니까. 당시에 강남 50평(165㎡) 아파트가 1억5000만원이었어요. 뮤지컬이 뭔지, 창작뮤지컬이 뭔지 개념도 없을 때니까 적자가 아닌 것만으로도 기적이지. 그러고나서 바로 브로드웨이를 두드렸죠. 그리고 2002년에는 영국에서 '명성황후' 공연을 했어요. 두 번 다 돈이 있어서 간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가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얘기는 물질보다 신념이 이긴다는 것. 어떤 상황에도 신념이 강하면 이뤄진다는 것.

뮤지컬 연출가 윤호진(67·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은 '한국 뮤지컬의 대부'로 불린다. 1990년대 국내에 뮤지컬을 태동시킴과 동시에 뮤지컬 본고장에 우리 뮤지컬을 올려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개척자들에겐 남다른 정신이 있다. 윤 원장에게도 있는 그것, '크게 꿈꾸고 신념을 따르는 것'이었다. 을미사변이 난지 100년 되던 1995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은 2009년 이들을 소재로 한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을 세상에 내놓고 뮤지컬의 양대산맥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까지 선보였다. '영웅'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 2월 중국 하얼빈에서의 공연이 성사돼 역사적인 무대를 꾸몄다. 매번 "독립운동 하듯"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열악한 여건을 이길 방법이 없어요. 배우들에게도 돈 많이 받으면서 편하게 독립운동하는 것 봤느냐고 말했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는 동기부여는 리더의 역할이기도 해요. 우리 스태프, 배우들은 '대한민국 뮤지컬 새로운 20년 역사의 주역'이라고 늘 강조해요. 이걸 연습실에 커다랗게 붙여놨어요."

올해는 그 '명성황후'가 초연 20주년을 맞았다. 윤 원장의 인생 여정은 한국 뮤지컬의 역사와 다름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6일 서울 대학로 윤 원장의 연구실에서 만나 그의 인생 얘기를 들어봤다.

■윤호진 원장 약력△67세 △충남 당진 △1970년 극단 실험극장 입단 △홍익대 정밀기계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연극학 석사 △뉴욕대 대학원 공연학 석사 △한국연극연출가협회장 △에이콤인터내셔날 대표 △단국대 공연예술학부 교수 △한국뮤지컬협회장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총감독 △광복 70주년 경축식 총감독 △주요작품: 연극 '아일랜드' '사람의 아들' '신의 아그네스', 뮤지컬 '명성황후' '아가씨와 건달들' '페임' '겨울나그네' '몽유도원도' '러브' '영웅'

■'영화광' 소년에서 사회성 짙은 연극 연출가로

어릴 적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영화를 일주일에 최소 네 편은 봤다. 당시 경남극장, 우미관, 허리우드극장 등 대부분의 영화관들은 러브스토리, 서부활극 등 주로 상영하는 장르가 있어서 캐릭터가 뚜렷했는데, 윤 원장은 사회성 짙은 영화를 좋아해 종로2가에 있던 우미관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기차가 끊기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영화를 보다가 걸어서 집에 간 날이 숱했다. 그 열정이 어느 날 연극으로 옮겨붙었다.

"미친듯이 영화를 보러 다녔어요. 영화광이었지. 근데 고등학교 때 우연찮게 연극을 한 편 보고 충격을 먹은거지. 실험극장의 연극 '피가로의 결혼'이었어요. 사람이 무대에 직접 나와서 연기하는 에너지가 엄청난 것이더라고. 그때부터 연극에 빠졌지."

당연히 연극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집안 말아먹을 놈"이라며 가족들이 결사 반대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길 원하셨다.

"의대 들어갈 성적은 안돼서 공대에 갔죠. 근데 생각이 딴 데 가 있으니 공부가 되겠나. 학교는 뒷전이고 실험극장 연구단원으로 들어갔어요. 그래놓고 수업 안들어가고 레포트로 대체하고 그랬지. 졸업은 해야겠으니까. 그땐 그게 통했어."

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했지만 연극을 만드는 데 더 마음이 갔다. 1977년 인권 문제를 다룬 연극 '아일랜드'를 연출했다. 유신이 서슬 퍼렇던 당시로서는 "무시무시한 연극"이었다. 스물 아홉이던 윤 원장은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연출상 최연소 수상자의 영예를 안았다.

"젊었을 땐 그런 작품만 눈이 갔어. '아일랜드'는 남아프리카의 인권 얘기였지만 사실 우리 문제를 건드린 거였어요. 잡혀갈 거 각오하고 만들었는데 검열관이 전혀 모르고 지나가더라고요. 하하. 고은, 황석영 선생님이 와서 보시고는 당신네가 '선전부장'을 하겠다며 관객 모아오고 그랬어."

■'캣츠'에 눈이 번쩍…"뮤지컬하면 밑빠진 독 물붓기 안하겠구나"

연극에 심취해 있던 윤 원장이 뮤지컬에 눈을 뜬 건 1982년. 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연극 연출가를 대상으로 보내주는 해외연수를 통해 영국 런던에 갔을 때다. 도착하자마자 뉴런던시어터에서 초연의 막을 올린 뮤지컬 '캣츠'를 봤다.

"이런 게 있나 싶었어요. 깜짝 놀랐지. 아, 뮤지컬을 해야겠다, 바로 결심했죠."

당시 윤 원장에게 연극은 '밑 빠진 독에 물붓는 일' 같았다. "내 인생 아직 많이 남았는데, 계속 이렇게 가면 안되겠다, 자립할 수 있는 구조를 찾아보자, 생각했어요. 뮤지컬을 보니까 현대인이 딱 좋아할 수밖에 없겠더라고. 노래와 극이 있으면서 오페라보다 이해하기 쉬우니까."

뮤지컬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1984년 미국으로 향했다. 뉴욕대 공연예술대학원에서 4년간 "고생고생 하며" 뮤지컬을 공부했다.

"땡전 한푼없이 갔어요. 도매상에서 악세사리, 짝퉁시계 같은 거 떼다가 길바닥에서 팔았죠. 하루 12시간 일하면 45달러 정도 버는데 그게 딱 브로드웨이 공연 한편 값이었어. 안 본거 없이 다 봤어. 그 때 본 것들이 공부가 많이 됐고 학교에서 배운 이론에 녹아서 '명성황후'를 만드는 자양분이 됐지."

■'아가씨와 건달들'로 금의환향…"미련 남을까봐" 세트 불살라

1987년 말 한국에 돌아왔고 이듬해 예술의전당 개관 기념작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을 무대에 올렸다.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지방공연 한번을 더 하고선 세트를 불살라버렸다. 이미 '명성황후'를 구상 중일 때였다.

"투자도 하나 없이 외상으로 시작해서 공연 끝나고 빚 다 갚았죠. 그러고도 5억이 남았어요. 근데 내가 돌아와서 하고 다닌 말이 있거든. 창작뮤지컬을 하겠다. 미련이 남을까봐 다 태워버린거지."

뮤지컬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목표는 창작뮤지컬로 세계무대에 오르는 거였다.

"원대한 꿈을 꿨어요. 미친 놈 소리 많이 들었지. 학생들에게 늘 하는 얘기도 이거에요. 꿈 꾸는데 돈 드느냐. 맘대로 꿔라. 대신 꾸지만 말고 행동으로 옮겨라. 이게 제 철학이에요."

1992년 한국 최초 뮤지컬 전문회사 에이콤인터내셔날을 설립하고 첫 창작뮤지컬의 소재를 뭘로 할까 고민하다 결정한 것이 '명성황후'였다. 마침 1995년은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100년되던 해였다. 윤 원장은 "이거야말로 제대로 하면 세계무대에 내놓을만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을미사변은 역사책에 짧게 언급되는 정도였는데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일본 소설가의 손으로 '민비 암살'이 쓰여지기도 했죠. 꼬박 5년을 여기에 몰두했어요."

뮤지컬 '명성황후'

■짧은 시간 세계적 수준으로…"'명성황후'는 한국 뮤지컬의 자부심"

1995년 '명성황후'가 초연될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장편 뮤지컬이 드물었다. 라이선스 개념도 없어서 당시 무대에 오르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는 건 전부 해적판이었다.

"한국 뮤지컬 역사에서 '명성황후'가 의미있는 이유는 짧은 시간 내에 세계적 수준의 국내 순수 창작뮤지컬을 만들었다는 점이죠. 이걸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 아시아권 어느 나라보다 우리가 10년 이상 앞서 있어요. 뮤지컬을 먼저 시작한 일본보다도요."

올해 광복 70주년, 초연 20주년을 맞아 오는 7월 25일~9월 12일 초연 극장이었던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명성황후'가 다시 공연된다. '명성황후'의 포스터를 20년간 지키던 이만익 작가의 그림 대신 희망을 상징하는 '나비'를 전면에 내세웠다. 음악도 전부 새로 편곡하고 새로운 곡도 추가했다.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그동안 '명성황후'가 어떻게 변해왔나 쭉 훑어봤죠. 초연 버전은 창피해서 못보겠더라고. 하하. 그만큼 감각이 많이 바뀐거지. 새로운 20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준비했어요. 영상이 많이 사용돼 더 화려하고 현대적이고. 처음에 나오는 히로시마 원폭 장면 대신 명성황후의 혼례 장면이 화려하게 연출돼요. 조연급이던 홍계훈 역할을 주연급으로 키웠고, 최근에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나오잖아요. 그런 부분도 반영했고요."

■"창작뮤지컬로 세계시장 계속 두드려야"

항상 세계 무대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드는 그다. 지난해 10월 첫 선보인 뮤지컬 '보이첵'은 대본을 처음부터 영어로 썼다. 흥행엔 실패했다. 하지만 아직 실패했다고 단정하긴 이르다. 오히려 이 기세를 몰아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보이첵'을 뮤지컬로 만든 건 세계 최초거든. 호흡을 가다듬어서 독일에서도 선보일 거예요. 한국 뮤지컬 전체 시장을 놓고 봐도 계속 창작을 해야 해요. 라이선스는 한계가 있어요. 외국도 제작 형편이 우리보다 크게 좋지 않아요. '미스 사이공'이나 '오페라의 유령' 같은 좋은 작품들이 계속 나오기는 어렵다는 거지. 스타 캐스팅에 의존해서 그저 그런 라이선스 작품만 하다간 위기를 못 벗어나지. 시장구조가 변해야 해요."

윤 원장은 영화시장의 예를 들었다. 외국 블록버스터보다 한국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게 현실. 뮤지컬 시장도 그렇게 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것이 빛을 발하는 시점이에요. 다만 고민해야지. 관객에게 라이선스보다 더 좋은 느낌을 주는 창작뮤지컬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확률상으로 어려운 게임이지. 근데 그건 브로드웨이도 마찬가지에요. 수십개 공연이 올라오지만 이름이 남는 건 일년에 한두개니까."

윤 원장은 중국 시장을 주목하고 있다. 하반기에는 '영웅'으로 중국 투어를 계획 중이다. 배우, 스태프 모두 현지인을 기용한다. 중극 현대음악의 대부로 통하는 동포 작곡가 정율성(1918~1976)을 소재로 한 뮤지컬도 중국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정율성 선생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아프니까 치료하려고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았어요. 혁명군이 무슨 돈이 있었겠어. 그래서 그 딸 이름이 소제야. 중국어로 바이올린이란 뜻이거든. 그런 드라마틱한 얘기들이 많이 있어요."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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