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일기장 116권 .. 77세 한국인의 하루하루가 곧 역사다

정재숙 입력 2015. 6. 19. 01:07 수정 2015. 6. 1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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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때부터 쓴 일기 기증 류우식씨전쟁·가족·시국 가감없이 기록차표와 영수증 등 생활사 자료고향 남원 옹기박물관 소장키로"난 물러나고 새 세대 .. 감회 깊어"
류우식씨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자택에서 1952년 1월 처음 쓰기 시작한 일기장 등 갱지 묶음 공책을 손에 들었다. 뒤쪽 책장에 꽂혀있는 노트들이 지난 60여 년 기록한 일기장 116권 중 일부다. [정재숙 기자]

파삭 부스러질 듯 누런 갱지 묶음 위에 ‘삶자욱’이란 도장이 찍혀있다. 어른 손바닥만 한 공책에는 붉은 글씨로 ‘1952.1.4.’라고 씌어있다. 당시 전북 남원 용성중학교 3학년이던 류우식(77)씨는 국어 담당 교사의 한마디에 꽂혀 일기쓰기를 일생 꼭 해야 할 일 첫째로 삼았다. 종이를 아껴쓰려는 듯 한 장을 네 단락으로 나눈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선생님의 말씀이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부터 일기를 쓰기로 명심했다.”

 그로부터 63년째, 류씨는 단 하루도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1950년대 초부터 모아온 일기장 권수가 올해로 116권이다. 물자가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을 지나온 이답게 구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와 재질의 노트와 다이어리에 한글과 한문을 섞어 펜글씨로 쓴 일기는 그 자체로 한 서민의 생활사가 되었다.

 “이리 역에서 열차를 타고 전주에 도착하니 별안간 차를 비우라 하고 차를 못 타는 사람이 수백에 이르렀다. 이들은 모두 굶주림에 못 이겨 나물이라도 뜯어먹고 살려고 멀리 떨어진 산촌에 가려는 촌부들이었다. 나는 가슴에서 뜨거운 무엇이 뭉클 올라왔다. 세상을 원망하겠는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사상 분열이 큰 관계가 된다.”(1952년 5월 13일 화요일)

 6·25를 겪으며 조국과 이웃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소년의 눈길이 느껴진다. 평생 일기장을 길동무 삼아 걸어온 그는 “비록 하찮은 삶의 발자국이지만 내게는 의미 있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버릇처럼 일기를 쓰면서 그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 하나를 간직한 셈이 됐다. 옛 체신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과학기술부에서 정년을 한 그의 공직 인생은 단 한마디 ‘절대 정직’에 충실한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거짓은 없다는 좌우명을 지키는데 일기장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보통 사람으로서 꾀는 못 부려도 살려고 가늘게나마 노력한 흔적”이 자신의 일기라고 그는 고백했다.

 “일신상의 변화나, 가족의 역사, 삶의 갈등과 시류, 친교 관계 등 개인적인 일들뿐 아니라 세상과 인정, 시국의 변화도 담았으니 한 시대에 묻혀 묵묵히 살아온 평민의 숨김없는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류씨는 자신이 죽고 나면 이 일기장이 애물단지가 될까 두려워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고향 남원의 옹기박물관(관장 류성우)이 소장품으로 거두고 싶다는 뜻을 전해와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일기장에는 각종 차표와 영수증, 입장권 등 그때그때 류씨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 기념물들이 첨부돼 있어 생활사의 자료적 가치도 크다.

 “새해 들어 맨 처음으로 쓰는 순간이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못난 남편, 아버지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가족에게 군림하지 않는 인자로운 가장이 되게 해주십시오.”(2001.1.1)

 그는 일기를 쓰면서 강파르던 성격을 고치게 됐다고 털어놨다. 수십 년 지난 일기를 요즘 죽 다시 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많이 컸구나, 이제 나는 물러나고 새 세대가 등장하는구나, 싶어 감회가 깊다”고 말했다.

 “내가 아이들 보호자였다고 자부했는데 이제 피보호자가 되는구나 깨닫는 순간, 감동스러웠어요. 나의 이 영혼자서전이 혹시라도 후대 자손들이 걸어가는 길에 작은 등불이 된다면 좋겠어요.”

 그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삶의 방향으로 삼고, 냉지열행(冷知熱行)을 행동원리로 살아가자고 매일 일기장에 대고 털어놓았던 순간이 좋았다며 웃었다.

 “종이가 얼마나 말을 잘 알아듣는지 아세요. 단 며칠이라도 일기를 써보세요. 인생이 달라져요.”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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