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굴뚝 위에서 망가졌다..비참하게 내려왔다"

2015. 6. 1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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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 쌍용차 해고자 김정욱의 고백

우리가 몰랐던 쌍용차 극한농성의 상처
70m 위 굴뚝은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2009년 정리해고 이후 6년을 싸웠다. 옥쇄파업을 했고, 단식투쟁을 했다. 삼보일배를 하고, 오체투지를 했다. 희망식당을 열고, 희망버스를 탔으며, 희망텐트에 모여 서로를 다독였다. 와락에서 함께 밥을 먹었고, 마음도 다스렸다. 법적 쟁송도 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 김정욱은 정책기획실장 이창근과 한겨울 70m 굴뚝에 올랐다. 김정욱은 89일, 이창근은 101일 동안 버텼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김정욱과 이창근은 상처를 입었다. 온몸으로 호소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세상이 안긴 상처이지만, 고립된 공간에서 각자의 인간으로 부대끼며 입힌 가해와 피해이기도 했다. 개인 자격으로 언론과 만나는 걸 원치 않아왔던 김정욱을 만난 까닭이다. 굴뚝 이전과 이후의 김정욱은 다른 사람이 됐다. 6년 동안의 싸움과 89일 동안의 극한 농성이 개인 김정욱에게 어떤 생채기를 냈는지 들어봤다. 지난 5월26일과 6월2일 이틀에 걸쳐 서울 대한문 안 덕수궁 연못 옆 벤치에서 그를 만났다. 사진은 5월26일의 모습이다.
김정욱을 처음 본 건 2011년 10월11일 경기도 평택시 군문동에 있는 평택장례문화원 특3호실이었다. 쌍용차 희망퇴직자 김철강(35)의 빈소였다. 김철강은 하루 전 평택시 비전1동에 있는 아파트 자신의 방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인 김철강을 위해 김정욱이 상주를 맡았다. 맞절을 한 뒤, 나는 그의 전화번호를 ‘쌍용차 김철강 상주 김정욱’으로 저장했다. 그리고 4년 만에 만났다. 이번에는 상주와 조문객이 아니라,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관계였다.

나는 굴뚝 위에서 망가졌다, 비참하게 내려왔다

정중함은 자주 방어적이다. 항상 상대를 깍듯이 대한다는 건 파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겠다는 몸짓이다. 감정을 억제한다는 건 그만큼 속내를 보여주기 싫다는 의지다. 지난겨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이창근(42)과 함께 굴뚝 농성을 했던 사무국장 김정욱(44)은 정중하고 깍듯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에게도 말을 놓는 법이 없다. 그는 집회 도중 경찰과 몸을 부딪치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한다. ‘이런 사람과 속내를 털어놓는 인터뷰가 가능할까.’ 걱정이 앞섰다. 심지어 기자가 듣고자 하는 건, 그의 마음을 헤집는 이야기다.

지난 3월 굴뚝 농성이 끝나고 김정욱과 이창근 모두 오래 노조를 떠나 있었다. 둘 모두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도넛형으로 폭이 1m에 불과한 70m 높이 굴뚝에서 고립된 상태로 고공농성을 한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국 사회 일부가 뜨거움으로 호응했던 고공농성은 두 사람을 어떻게 아픔으로 내몰았을까. 궁금했다.

김정욱이 편하게 생각하는 곳으로 인터뷰 장소를 택하게 했다. 그는 대한문을 제안했다. 쌍용차지부가 2년 가까이 분향소를 차려 농성했던 곳이다. 햇볕이 따가웠던 5월26일과 6월2일 이틀에 걸쳐 대한문 안 덕수궁 연못 옆 벤치, 그가 농성하며 끼니를 떼웠다는 올레식당, 그가 가끔 산책했던 정동 서울시청 별관 앞 벤치, 그가 사람을 만날 때 찾았다는 서소문로 커피앤모아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김정욱은 8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5차례 눈물을 보였다.

굴뚝에서 내려온 뒤 심리 치유

-대한문이 편안하신가 보다.

“저한테 되게 특별한 곳이었어요. 긴 시간 동안 저희가 힘들게 살아왔는데, 삶의 에너지를 축적했던 시간이 있어서 가능했거든요. 그런 시간을 보낸 곳이에요. 2012년 4월5일 평택에서 대한문으로 올라왔습니다. 정말 힘든 때였어요. 22번째 동료의 죽음 때문에 올라왔는데, 분향소 하나 차리지 못하게 했어요. 서러웠어요. 길바닥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하지만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여기 있으면서 많은 사람이 찾아와 연대를 가르쳐줬죠. 사람들이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말해요. 왜 미안하다고 말하는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나중에야 ‘아… 우리가 대신 싸우고 있는 거구나. 우리가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힘들다는 생각보단 사람들 만나면 에너지가 쌓이는 느낌이 들었죠.”

-굴뚝에서 내려온 지 두달 반 정도 지났어요. 건강 상태는 어떤가요?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마음이든 몸이든 아픈 구석이 있어요. 잘 치유받아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해요.”

-몸은 어디가 아프신가요?

“2006년에 생산 라인 컨베이어 벨트 작업중 미끄러져 주저앉으면서 허리를 삐끗했어요. 척추 관절이 어긋나니까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굴뚝에서 더 악화한 건 아닌가요?

“아무래도 잠자리도 불편했고요. 벽 잡고 팔굽혀펴기, 앉았다 일어서기, 제자리뛰기 같은 운동을 했지만,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까 잘 안됐던 것 같아요. 제가 실은 추위를 많이 탑니다. 추위와 맞서는 게 가장 큰 곤욕이었어요.”

-마음에도 문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잠을 못 자는 증상이 있어요. 제가 내려왔을 때 굴뚝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잖아요. 굴뚝의 긴장 상태가 유지될 수밖에 없었어요. 불안 증세도 있고요. (의사한테) 말씀드리니까 ‘그러면 편하게 약을 복용해도 될 것 같다’고 해요. 우울증 약(안정제)을 복용하고 있어요.”

-정신적인 아픔은 오래된 문제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2011년쯤이었나요. 싸우는 게 힘들다기보다 죽어가는 동료나 가족들 때문에 힘들었죠.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감당이 안 됐죠. 그때 정혜신 선생님이 저희한테 왔어요. ‘치료를 잘 받으면 투쟁도 잘할 수 있다’고 말했죠. 8주 동안 집단 상담을 했는데, 4주까지는 냉랭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동료들도 마음을 꺼내놨죠. 그때 많이 울었어요. 제가 눈물이 좀 많아서. ‘아, 내 마음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동료들도 다 그랬구나’ 생각했어요.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틈을 서로에게 내보인 거죠.”

-어떤 마음들을 확인한 건가요?

“서로에 대해 서운해하고 있었어요. 공장 안에 있을 때 회사의 정리해고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라는 이름으로 나뉘었을 때, 그때의 공포와 불안이 결국 서로에게 향한 거죠. 공장 밖으로 밀려나고 나서도 희망 퇴직자나 해고자들은 실업급여를 받았거든요. 무급휴직자와 징계 해고자들은 못 받았어요. 그것에 대해서도 알게 모르게 편이 갈렸던 게 있었고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도 컸어요. 해고로 인한 아픔이라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가족들이나 아이들에게 그 감정을 표출한 거죠. 그런 마음들이 모두 비슷했어요.”

-서로의 잘못이 아니라 정부나 회사가 노노 갈등을 유도한 것이잖아요.

“네, 맞아요. 우리가 옥쇄파업을 할 때는 대상이 분명했잖아요. 정부나 공권력, 먹튀 한 상하이차,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책임지지 않는 회사 경영자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죠. 우리는 저항을 했고, 우리의 저항이 정당했음에도 오히려 사회는 ‘너희가 잘못했다. 너희는 불순세력이고 빨갱이다’라고 낙인을 찍어버리니까, 모두 지친 거죠. 그러다 보니까 같이 있는 동료들과 작은 틈이 생기면 그 분노를 표출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인터뷰가 열심히 투쟁하는
이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울 수도
그러나 투쟁하는 사람들 고통을
사회가 잘 보듬어줘야 하는 시점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 해야 할 것”

한국 사회는 쌍용차 해고자들을
전선에 몰아넣고 안전한 후방에서
박수치고 응원하며 안도했다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한 것일까
극단에 몰린 해고자들은 아팠다

지난해 12월31일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굴뚝에서 해고 복직 고공농성을 벌이던 김정욱 당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오른쪽)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식사와 물 등을 올려받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미안함’은 오랫동안 싸워온 원동력

앉아 있는 벤치에 따가운 햇볕이 찾아들었다. 그늘진 옆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김정욱은 뜬금없이 “공장 안에 있을 때 작업복 입는 걸 꽤나 좋아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그는 “저는 대공장 사업장에 있으니 더 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자꾸 있어서 작업복 입고 집회 나가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하세요.

“저도 과도하다고 느낄 때가 좀 있어요. 그래도 뭔 생각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게 ‘미안하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 같아요.”

-그 미안함이 김정욱이 오랫동안 싸워온 원동력이었나요?

“네, 그런 것 같아요. 그게 아….”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그 말이 저를 좀 건강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제가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힘이기도 하고요. 저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아요.”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눈물을 흘리신 건가요?

“주변 사람들이 제게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좀 그만해라’고 말해요. 그런데 항상 받는 건 많은데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고, 그런 것에 대한 미안함이 좀 있어요. 좀더 건강하게 뭔가를 좀더 해야 하는데….”

-충분히 많이 해오셨어요.

“그런데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정말, 여전히 그래요.”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노조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 얘기를 좀 해볼까요?

“저는 1993년 7월8일, 23살 때 입사했어요. 군대 다녀와서 입사를 했죠. 입사 직전 면접을 할 때 잠깐 공장을 둘러볼 시간이 있었는데요. 그때 현수막이 하나 붙어 있었어요. ‘쌍용자동차 3대 노조위원장 이취임식’이라고 적혀 있었죠. ‘아, 나도 쌍용차 입사하면 조합원이 되어야겠다’ 생각했죠.”

22년 전인데 날짜 하나 틀리지 않았다. 얼굴도 금세 밝아졌다. 김정욱은 길게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앞 냇가가 섬진강이고, 앞산이 지리산’인 전남 곡성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고 했다. 골목대장으로 아이들을 모아 깡통차기, 쥐불놀이, 냇가에서 물고기잡기와 썰매타기를 했다며 즐거워했다. 전교조 출범으로 사회가 꿈틀대던 1980년대 말 전남곡성종합고에서 ‘체벌하지 않는’ 특별한 선생님을 만난 이야기도 풀어놨다. 그는 학생회 간부를 하면서 학내 비리 문제와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알게 됐고 “나도 이런 사람들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지금 곡성에 계신가요?

“2009년 옥쇄파업 즈음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2004년께 폐가 굳어지는 폐섬유화증 통보를 받으셨는데, 치료법이 없었어요.”

쌍용차는 2009년 4월 2646명의 노동자를 구조조정하겠다는 방침을 쌍용차지부에 통보했다. 쌍용차지부는 정리해고 철폐를 주장하며 5월22일부터 평택공장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구조조정 대상자 가운데 1666명이 희망퇴직 등으로 퇴사했고, 회사는 나머지 980명을 6월8일자로 정리해고했다. 김정욱에겐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있었다.

“지부에서 사람을 붙여줬어요. 2009년 6월15일 새벽에 몰래 공장에서 나가서 광주의 병원으로 갔죠. 아버지는 의식이 깨어 있었는데, 호흡이 안 되니까 힘들어하고 계셨어요. 제 손을 잡으시며 ‘아들 왔냐’고 하더군요. 30분 뒤에 임종하셨어요. 저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때 정말 너무 죄스러웠습니다. 나중에 구치소에서 그때 생각이 나서 밥 먹다가 혼자 펑펑 운 적도 있어요.”

그는 또 눈물을 흘렸다. 분위기를 전환하는 건 쉽지 않았다. 김정욱은 얼굴에 파인 주름만큼 아픔을 새기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김정욱에게 안긴 아픔은 김정욱 안에서 늘 ‘미안함’으로 환원됐다. 그런 김정욱에게서 좀더 조직 안의 김정욱이 아니라 개인 김정욱을 끌어내고 싶었다.

굴뚝 이후 쌍용차 지부와 거리 둔 이유

-2009년 정리해고 이후 조직 활동을 떠난 건 처음인데, 어때요?

“굴뚝에서 내려오니까 제가 많이 지쳐 있었어요. 잘 쉬지 못하면 복직투쟁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잘 못할 것 같았고요. 내가 이 활동에 대해 삶을 너무 많이 고착시키는 문제와 관련해서 조금 고민스러운 것도 있었어요. 조금은 싫증도 생겼고요. 힘겹다 보니까. 도피하고 싶었던 마음도 잠시나마 느낀 적이 있습니다. 쉬면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 계기를 살펴야 할 것 같았어요.”

-조직의 경직성 문제가 있다고 보시나요?

“제가 시골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현대차 노조 얘기를 많이 해요. 다른 것보다 정년퇴직하면 자녀들에게 가산점을 주는 단체협약 같은 거요. ‘세습을 하는 거 아니냐’, ‘1억 받는 노동자들이 자기들 것만 더 챙기려고 한다’고들 하세요. 집회 문화도 그래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방식, 틀을 고집하잖아요. 가족들이 왔는데, 과격한 구호를 외치면 무섭다고들 말하거든요.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칙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밀하게 손을 내밀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투쟁하는 사람들과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와서 밥도 같이 먹고 커피도 한잔 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게 중요해요.”

-쌍용차지부는 그런 걸 잘해오지 않았나요. 희망식당이 한 예죠.

“전체 노조에 대한 이야기지요.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처럼 힘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좀더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할 것 같아요.”

-싫증이 생겼다고 하셨는데요.

“사람에 대한 문제도 있고, 제 자신에 대해 그런 걸 수도 있어요. 아주 사소한 일로 감정들을 다치는 것 같아요. 6년 동안 싸우면서 많은 분이 도움을 주신 덕분에 후원금에서 조금씩 생계비, 활동비를 사용하는데요. 건강이 많이들 안 좋잖아요. 아픈 사람들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배려는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하게 배려를 할 수는 없어요. 배려의 범위를 자꾸 넓히면 조직이 흔들린다고 생각하니까요. 사람들이 쉬고 그러면 생계비를 까요. 그러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서 사람을 고립시키기는 일도 있어요. 약한 사람을 찾는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자기가 잘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각을 세우려고 못 싸우는 사람들을 배제하려고 하는 모습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보이는 거죠. 그래서 우리 내부에도 버티고 버티다가, 떠난 분들이 몇 분 계세요.”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일을 하니 더 힘이 들겠네요.

“힘들게 투쟁하다 보면 밥 한끼라도 맛있는 거 먹자 싶지만, 우리는 지부 사무실에서 밥을 해 먹어요. 부식이라도 맛있는 거 사주고 그래야 하는데, 제가 그런 걸 잘 못하게 하거든요. 부득이하게 식당을 가게 되어도, 저는 술 먹는 데 투쟁기금을 쓰지 못하게 해요. 그런데 술 안 먹고는 잠을 못 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힘드니까 술 먹고 마음을 달래고 싶은데 제가 안 된다는 소리를 자주 하니까, 밥 먹을 때도 눈치를 봐야 하냐며 불만이 쌓이기도 하죠.”

김정욱과 쌍용차 사태, 굴뚝농성 일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어느 순간 그냥 ‘새가 되고 싶다…’

굴뚝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됐다.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이었지만, 깊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멀리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정욱은 “굴뚝에서 내려왔을 때 주변의 번잡함이나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움직임 이런 게 되게 싫었다”고 말했다. 다른 까닭도 있었다.

-굴뚝에서 고립감이 상당했을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이 고통스러웠나요?

하지만 여전히 빨랐는지, 이 질문이 나오자 얼굴이 굳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기도 했고, 얼굴을 두어번 쓰다듬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이야기를 안 하고 싶다는 마음이 여전히 커요. 가장 힘들었던 시간의 정점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즐거울 때도 있었어요. 밥 먹는 시간이죠. 와락 식구들이 밥을 맛있게 정성들여서 마련해 올려준 게 보이거든요. 그런 마음들이 즐겁죠. 그런데 힘겨움이란 건, 결국 조급함 때문에 온 것 같습니다. 문제 해결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됐을 때, 에스엔에스(SNS) 등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좀 가져달라 호소하고, 회사 쪽에도 사정을 호소했죠.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회사나 정부에 대해 잘 전달해보려고, 우리가 가진 고통은 외면하고 좋은 모습만 담아내려고 했습니다. 그게 사실 힘이 들었어요.”

-고공농성중인 사람은 언제나 멀쩡하고 밝아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던 거군요. 아이콘이 됐으니까요.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이 있으니까 이전에 고공농성했던 사람들이 솔직한 이야기를 안 했던 거예요. 저도 올라가 보니까 그 심정을 이해하겠더라고요. 고립감은 솔직히 엄청났어요. 위에서는 막 몸부림을 치고 있고 뭔가 해결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데, 굴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평온하잖아요. 그럼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고요. 최근에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고 여전히 고공농성중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차광호 대표와 통화도 했어요. 물어보니 두 사람도 똑같은 감정이래요. 불쑥불쑥 화가 난다고 해요.”

-화가 나는 대상은 누군가요?

“그게 좀 표현하기가 그래요. 대상보다는 상황인데요. 별거 아닌 일로 감정에 자극을 확 받는 거죠. 서운하다는 느낌이 들고요. 굴뚝 가기 전에는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을 굴뚝 이후엔 아닌 것 같고, 그래요.”

-스마트폰으로 변하지 않는 세상을 전하는 뉴스를 보면서, 고립되어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 무력감이 컸을 것 같아요.

“사람에 대한 온기가 그리웠어요. 창근씨나 저나 직접 사람을 보는 게 절실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희가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 더 강해져야 한다 세뇌를 했죠. 대한문에 있을 땐 힘들면 기댈 수도 있고, 힘들다 얘기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굴뚝에선 아니었죠. 에스엔에스로 사람들이 제가 어떻게 있는지 다 보니까요. 힘들다는 내색을 할 수가 없었어요. 문제가 안 풀리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죠. 특히 공장 안에 있는 동료들이 더 많이 움직여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기대한 만큼 내부 반응은 나오지 않았어요. 차광호씨가 ‘100일 전후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생각이 든 건가요?

“60일쯤 지났을 땐가요.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이 왔다 가고, 문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8일 정도 곡기를 끊었어요. 교섭이 열리면서 급물살을 탈 것 같았는데 잘 안됐죠. 그러면서 ‘아, 내가 여기 있어도 잘 안 풀릴 수도 있겠구나.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그냥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순간 그냥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굴뚝에 올라가서 시간이 좀 지나니까 높이에 대한 느낌이 잘 안 와닿았어요. ‘여기서 뛰어내려도 되는 것 아닌가. 내려갈 수 있는 거 아냐’ 이런 느낌이 순간적으로 확 들었어요. 그런 느낌이 4~5일 정도 왔어요.”

오랜 싸움으로 모두 아팠다. 굴뚝 위의 이창근과 김정욱도 아팠고, 그들을 대하는 지부 사람들도 아팠다. 지난 7일 공개된 고려대 김승섭 교수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쌍용차 해고자 142명 가운데 75.2%가 ‘지난 1년간 우울 및 불안장애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지난 1년간 불면증 및 수면장애 경험이 있다’고 답한 해고자도 72.2%나 됐다. 하지만 지난 6년 동안 쌍용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한 정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창근은 2012년께 조울병 판정을 받았다. 달팽이관 이상으로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이창근은 지금도 2주에 한번씩 정신과에 다닌다. 아침저녁으로 조울병 약을 복용한다. 두달이 넘는 굴뚝 농성에도 쌍용차와 정치가 응답하지 않으면서 고립된 이들 사이에서 갈등만 극에 달했다. 이창근은 굴뚝에서 거친 말과 욕설을 쏟아냈다. 고립된 공간에서 김정욱은 공포를 느꼈다. 이창근은 최근 통화에서 “굴뚝 아래 지부와 굴뚝에 함께 있는 김정욱이 교섭과 외부 대응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김정욱은 더는 굴뚝 농성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람을 살리려고 투쟁을 시작했는데 사람이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부는 그 판단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서로 생채기를 냈다.

“위에서는 막 몸부림치고 있는데
아래 내려다보면 평온해 보이고
‘난 도대체 뭘 하는가’ 생각 들고
불쑥불쑥 화나고 서운하고
김진숙, 차광호씨도 그랬대요”

“굴뚝서 내려가야 한다고 봤어요
그런데 지부에선 버텨달라 했죠
‘죽어서 내려가는 꼴 볼래’ 그랬죠
내려오면서도 되게 비참했어요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고공농성, 막상 해보니까
잘못하면 사람 죽이는 거란 생각
철저하게 자기와의 싸움으로,
관계 파괴 방식으로 싸우게 하니까
스스로에게 주는 또 다른 고문”

“창근씨가 아픈 줄 저도 몰랐어요”

-굴뚝에서 내려오는 과정에도 서로 상처를 입었나요?

“그건 대단히 민감한 얘기인데요. 저희 얘기 전에 스타케미칼 얘기부터 할게요. 1년 넘게 굴뚝 농성을 하고 있는 차광호씨와 굴뚝 아래 있는 스타케미칼 해고자들 사이도 힘들어요. 밑에선 투쟁을 잘해보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상대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까 어려움이 있고요. 그래서 밑에서는 차광호씨를 안전하게 내렸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차광호씨는 이왕 굴뚝에 올라왔으니 뭐라도 결과를 내고 내려가겠다고 생각해요. 우리 굴뚝 상황은 반대였어요. 지부에선 우리가 고생하고 있으니까 뭐라도 성과를 만들어봤으면 좋겠다 생각한 거지요. 창근씨와 함께 있는 저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힘들었어요.”

굴뚝 후반기 이창근과 통화를 하면, 고양된 감정과 조급한 마음이 온몸으로 전달됐다. 그는 절박함에 쫓기고 있었다. 불안해했다.

“내려가야 한다는 판단을 했어요. 그런데 지부에선 막판까지 시간을 벌어달라고 했고요. 저로선 그럴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고 생각했어요. 상황이 매우 악화일로로 가고 있었으니까요. 밑에 에스오에스(SOS)를 치고 ‘곧 내려가겠다’고 했죠. 하지만 지부는 여전히 ‘네가 더 버텨야 하는 것 아니냐. 더 버틸 수 없냐’고 하더군요. 그때 제가 감정이 확 돌아서서 ‘내가 죽어서 내려가는 꼴 볼래요’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실은 내려오면서도 되게 비참했어요. 내려오면서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상황이 악화한 건 언제부터였나요?

“창근씨도 역시 마힌드라 회장이 다녀간 뒤였어요. 그 이후에 창근씨가 사람들이랑 통화하는 걸 들으면서 계속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속도가 빨라지고, 감정이 고양되고, 급기야 거친 말을 하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했어요. 실은 이전까지 창근씨가 아픈 줄 저도 잘 몰랐어요. 이전에는 사람을 챙기는 것보다 투쟁을 잘하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내려와서 지부와는 얘기를 좀 하셨나요?

“김득중 지부장이나 임원들에겐 이야기를 했지요. ‘솔직히 힘들었다. 서운했다. 서운한 것보다 더했다.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과 조직이, 안전하게 내려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더니 막상 보니까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했어요.”

-고립된 고공농성이 모든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붙인 것 같아요.

“‘아, 이렇게 투쟁하는 게 맞나’ 이런 생각들을 했어요. 제가 이렇게 인터뷰하는 게 열심히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젠 투쟁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사회가 잘 보듬어줘야 하는 시점이 됐어요. 그래서 누군가는 지금쯤 이야기를 해야 한다 싶었어요.”

-무슨 이야기인가요?

“고공농성이 별것 아닌 것처럼 얘기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보면 고공농성, 사람들이 막 올라가잖아요. 마치 이렇게만 투쟁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데 아니잖아요. 막상 해보니까 잘못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철저하게 자기와의 싸움으로, 그리고 관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싸우게 하니까요. 그런 건 우리 스스로에게 주는 또다른 고문이에요. 언론에서 차광호씨 최장 기간 고공농성에 대해 ‘슬픈 신기록’이란 타이틀을 달았던데,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단하다고 박수쳐주고 더 응원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모든 투쟁의 부담이 오롯이 그들이 책임져야 할 몫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분노스러울 때가 있어요. 사회가 책임져야 할 몫인데.”

그의 눈시울이 또 붉게 물들었다.

“저도 굴뚝에 오르는 순간 ‘내가 이 사다리를 타고 다시 내려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굴뚝에 올라서서 보니까 저와 창근씨는 계속 굳건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어요. ‘저도 보통 사람이니까, 굳건한 모습만이 아니라 아픈 모습과 힘들어하는 모습을 편하게 가감없이 보여줘야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런데 창근씨는 생각이 달랐어요. 창근씨는 집중적으로 뭘 만들어보려고 하고, 굴뚝의 의미를 최대치로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굴뚝에서 내려오면 모든 게 끝난다 생각했던 것 아닐까요?

“그런데 돌아보면, 결국 창근씨도 지금과 같은 투쟁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했거든요. 창근씨는 간절하게 그 일상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다르게 표현됐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창근씨나 저나 같은 거죠. 그래서 창근씨의 상태를 그냥 본인 문제로만 보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잘 보호해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여기까지 오니 인터뷰 초반 “우리가 대신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했던 김정욱의 말이 새삼 아팠다. 한국 사회는 쌍용차 해고자들을 전선에 몰아놓고, 시민들은 안전한 후방에서 박수치며 응원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 생각하고 안도했다. 전선의 해고자들은 시민들의 응원에 응답하기 위해 어떤 ‘결과’를 가져와야 했다. 쌍용차와 정치의 무응답으로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자, 해고자들은 극단의 수단으로 자신들을 내몰았다. 극단은 그들을 아프게 했고, 고통은 함께 싸우는 이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표출했다.

지난 5월26일 서울 대한문 안 덕수궁 연못 옆 벤치에서 김정욱씨(오른쪽)를 만났다. 그가 제안한 이 장소는 쌍용차지부가 2년 가까이 분향소를 차려 농성했던 곳이다. 왼쪽은 이재훈 기자.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8번째 희생자 김종성 이야기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아픈 얘기는 하나 더 있었다.

-5월 초에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기셨어요. ‘며칠 전에 유언과도 같은 전화를 받지 못했다.’ 쌍용차 28번째 희생자 김종성씨에 대한 이야기지요?

“네. 2살 나이 많은 형이죠. 2009년에 공장에서 같이 쫓겨났죠. 그 형은 희망퇴직이라는 방법을 택했고, 저는 투쟁을 계속 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항상 제 주변에 있었어요. 가끔 전화로 소식도 전하고. 2013년쯤 대한문 분향소에 한번 보러 오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갑자기 집회가 잡혀서 이동하는 바람에, 찾아왔는데도 못 봤습니다. 굴뚝에 있을 때도 걱정된다고 전화를 주셨고요. 제가 굴뚝에서 내려와서 곡성에 있을 때, 모르는 번호로 ‘김종성 부고’라고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잘못 보낸 건가 했어요. 아니었어요. 종성이 형 딸 번호였어요. 너무 아팠어요.”

-마지막으로 못 본 게 마음에 남았겠군요.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귀농해서 사는 쌍용차 출신 친구 녀석이 술 먹고 전화를 해왔어요. 그 친구가 ‘종성이 형 2년 전에 나한테 한번 왔었다’고 해요. ‘뭔 일로 갔더냐’ 물었더니 ‘돈을 좀 빌리려고 왔더라’고 하더군요. 그 형이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힘들어 보이더냐’ 물었더니 ‘그래. 40만원 빌리러 왔더라’고 해요. 아! 그거 빌리려고, 자존심 다 구겨가면서… 그렇게까지 힘들었구나, 했어요.”

그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014년 11월 ‘쌍용차 정리해고가 정당했다’는 대법원 판결을 회고할 때까지 합쳐서 다섯번째 눈물이었다.

-이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삶의 공동체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속해 있는 지부의 범위보다 더 큰 규모의 공동체죠. 우리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힘겹게 살아서는 안 되잖아요. 투쟁도 투쟁이지만 다르게 연대하고 다르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걸 좀 해보고 싶어요.”

긴 인터뷰가 끝나자 김정욱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말은 이랬다. “우리도 이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살아왔다고 생각을 하는데, 버려졌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국가가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죠. 우리가 끊임없이 얘기했던 ‘함께 살자’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여전히 묻고 있는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있지요.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여지없이 마지막 말은 ‘미안하다’였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미안하다는 김정욱의 말은 함께 살자는 말이다. 굴뚝과 세상이 남긴 상처에도, 김정욱은 먼저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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